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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맛 만들기(眞福)

<참된 행복>

<참된 행복>

구상

 

오늘날 우리는 풍요한 물질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속에

서도 그 물질의 결핍, 즉 가난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은 이른바 상대적인 절망 속에 빠져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바

다.

이렇듯 오늘은 물질의 풍요 속에는 객관적으로 남과의 비교에서

계량되는 면과 또 하나는 그런 외적으로 잴 수 없는 주관적, 심리적

인 면과 있다 하겠다. 그래서 아무리 남보기에는 수입도 좋고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욕구불만 속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최소한도의 의식주를 유지할 뿐 현대식 생활용구

도 갖추지 못한 살림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과 가정의 단란을 누리는

이들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대 가정생활의 필수용품이라는 가스레

인지, 칼라텔레비전, 냉장고 ,청소기, 세탁기, 건조기, 전자렌인지

등은 물론 나아가서는 스테레오, 테이프, 레코더, 에어컨, 자가용까

지 완비되어 있어도 그것을 쓰고 사는 가족을의 단란이 그것을 못

갖추고 사는 가정이나 또 그런 문명의 이기가 없던 옛날 가정보다

나아졌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가령 텔레비전만 하여도 그것 때문에 가족간의 대화나 통정(通情)

이 소홀해지고 전기기구 때문에 주부들의 음식 마련이나 가사 처리

에 정성이 빠지는 경향이 없지 않다. 즉 물질의 풍요 속에 마음이

빈곤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저러한 마음의 빈곤증세는 어떤가 하면 첫째 생활의 공허감이나

허망감이다. 이것은 결국 그런 물질의 휘둘림에서 오는 자기상실이

요, 그 결핍감이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저러한 마음의 결핍감마

저 그것을 물질의 결핍이나 부족으로 착각하고 그 물질의 소유를 무

한량 추구하기에 혈안이 된다.

여기서 우리의 실제적 생활의 한 면을 살펴보면,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나 가정에게 있어서나 가장 중요한 저녁 시간에, 앞에서도 말

했다시피 그저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려놓음으로써 뉴스와 노래와 코

미디와 드라마 등으로 시간을 채우고 잠자리에 들고 나면 어떻게 자

신의 삶이나 가족들의 삶을 생각하고 알 시간이 있겠는가?

자신이나 가족이 오직 텔레비전의 화면이나 영상을 쫓음으로써 정

작 가족들이 가슴을 헤치고 서로 돕고 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귀먹

고 눈감고 마는 겪이 된다. 더구나 종일 남들 속에 휘말려 지내다가

그래도 자신을 돌이켜볼 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나면 '될 대로 되

라!'라는 일종의 자기포기 상태에 이르고 만다.

인생이란 드라마는 어쩌면 자기 스스로가 각본을 쓰고, 자기 스스

로가 연출을 하며 자기 스스로가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주역들이

TV극장의 배역들 흉내만을 내며 살고 또 살려고 드는 게 오늘의 우

리들의 모습이라면 과언일까? 이렇듯 남의 생각 속의 남들과 비슷

한 규격품처럼 살고서야 어찌 자기의 삶을 유일한 존재로서 독자적

삶이라 하겠는가?

참된 삶이라는 것과 그 행복이라는 것은 이상 살펴본 비물질적 조

건이나 그 객관적 척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존적 삶과 그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어쩌면 물질적인 것에서 쾌락을 얻어 낼지 모르지만

결코 행복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쾌락은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것이지만 행복은 육신과 아주

관계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정신적인 것이요, 전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쾌락은 육체의 그 어느 부분으로

감지되는 것으로서 가령 맛은 혀로써 알고, 냄새는 코로 맡는다든가,

배가 부른 것은 위나 장으로 알고, 소리의 아름다움은 귀로써

헤아리는 등 따위다.

그러나 행복이란 이렇게 육신의 감관만으로써는 잴 수가 없는 것

으로서 실제 머리만이 행복하다든가 배만이 행복하다고 할 수가 없

지 않은가?

그리고 저러한 물질로 해결되는 육신적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의 하나로 기타와 비어와 섹스로 상징되는 요새 젊은이들의

기호와 이와 함께 성의 문란이나 마약복용이 범람하고 있음은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 즉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보기는커녕 오히려 자아의 본질적 부분에 의식하거나

못하거나 결핍감과 공허감을 느낀다고 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마음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까? 나는 먼저 각자의 진정한 삶이란 남과의 비교에서, 특히나 물

질적 소유의 가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영위되고 있는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의지나 그 결단으로

영위되고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점검과 그 확인이 필요하다.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물론, 자신의 뜻과 그 의지에서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그 수입이나 지위가 똑같아도

그 삶의 생동감부터가 다르다.

그러나 흔히들 행복을 자기와 다른 사람과의 물질적 소유의 많고

적음에다 가늠하려고들 든다. 즉 자기가 남보다 더 많이 지녔다는

것에서 행복감을 맛보려 드는 것이다. 즉 남자들은 수입이나 지위,

입학이나 입사시험의 성적 순위, 자가용의 유무와 운전자격 면허의

취득 여하, 테니스나 골프의 진도나 그 우열 등에다 행복감을 지니

려 들고 여자들은 가옥 건물의 대소, 가구 집기의 호화도, 의상의

사치도, 고가 보석이나 장식품의 유무 등에서 행복감을 맛보려 드는

데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실상 삶의 보람이나 그 기쁨이란

그렇듯 물질적 소유나 누구나 욕망하는 그런 소유의 패턴에 다다르

는 데 있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가 다른 독자적이요, 독창

적인 삶을 찾아내고 노력하고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도 남과 같은, 또 함께 바라는 삶을 살려고 하여도 그런 획일적

삶이란 본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 행복을 수동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

향이 있는데 즉 자기가 추구해서 획득하는 게 아니고, 남(남편)이

해주는 거요, 남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

들은 행복을 남편이 잘 보살펴 주고 자신의 욕구를 잘 받아주고 채

워주는 데 있다고 믿고 그것을 바란다.

그러나 행복은 그렇듯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능동적이

요, 헌신적인 것으로 이 헌신은 물질적이기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것

이다. 좀 깊이 생각하면 산다는 것은 자기와 관련이 있는 모든 인연

(남이나 타존재)에 대한 응답이라고 하겠는데, 그 응답의 성실성 여

하가 그 삶을 풍요롭게도 하고 빈곤하게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 즉 상대방에게 바친 것은 자기에게 되돌아 오기

마련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받기 위해 준 것이 아니라 주는 그

자체가 한량없는 기쁨을 보상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석을 저 프로이드파의 한 사람인 프롬은, "진실로 줄 때

에는 그는 반대로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아니 받을 수 없다. 남에

게 주는 일은 또한 그 상대를 주는 사람으로 만들며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생명이 가까워진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정에서부터 실천해야 할 자기만이 지니는 삶의 정

신적 연모인 것이다.

이제 마음으로 우리가 마음의 빈곤을 극복하고 참다운 삶의 보람

과 그 기쁨을 맛보기에 내가 권하는 것은 저러한 물질적, 물리적(출

세나 권력), 정신적(인기나 명예) 소유에서보다 존재 그 자체가 혜여

(惠與)하는 무한량한 보화에다 눈을 돌리라고 말하고 싶다. 이로(理

路)를 거두고 함께 미국 시인 에이브러햄 L.그루버의 시 한 편을

음미하자.

<옆집의 장미>

내 옆집 덩굴 위의 붉은 장미는

내 옆집 사람의 소유지만

또한 나의 것이기도 하다.

그는 돈을 들이고 수고를 해서

기쁨을 차지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또한 나도 마찬가지다.

장미는 나를 위해서도 피었다.

정성을 들인 사람에게 아름다운 만큼

나에게도 아름다우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부자다.

모든 이웃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장미덩굴을 가꾼 착한 이웃 덕분에

(하략)

실상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조금만 세심하게 살피면 우리의 삶

자체가 참으로 경이로운 신비에 감싸여 있음을, 또한 저 '옆집의 장

미'와 같은 자연만에서가 아니라 뭇인간의 협동과 그 인정 속에서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그리고 사소한 사물이나 사상(事象)

이나 사리(事理) 속에서도 얼마든지 삶의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있

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가 소유의 세계에서만 생각한다면 저 이웃집 장미는 자

기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도 맛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렇듯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물질과 그 소유에서 찾고 있기 때문

에 이 세상에 언제나 충만하다고 할 진·선·미를 맛보지 못한다고

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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