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의 기적
한 신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에 어떤 자판기가 있었는데, 이 자판기는 신기하게도 100원을 넣으면 200원이 나온다는 것이다. 또다시 200원을 자판기에 넣으면 400원이 나온단다. 즉 무엇인가 이 자판기에 들어가면 두 배수로 나오는 신통방통한 결과가 나왔다.
당시에는 가수 이미자가 한참 인기가 있을 때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활동을 할 때인데, 마침 이 신통방통한 자판기 이야기를 듣고, 그 자판기에 자신을 밀어 넣으면, 자신하고 똑같은 사람이 나와 바쁜 생활의 고됨을 덜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가수 이미자는 자판기에 자신을 넣었다. 그랬더니 그 결과는 두 이미자가 아니라, 사미자가 나왔다는 황당하고 웃긴 에피소드였다.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을 전도 여행하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즉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요, 엘리야요,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도 물으니,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예수님의 생각과 꼭 맞는 정답이었다. 얼마나 그 답이 괜찮았으면, 즉석에서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 즉 반석으로 바꿔 주었다.
보통 성경에서는 이름만으로도 인물의 정체성이 표현되는데 정말 이름대로 그는 제자들의 으뜸이 되었고, 교회의 반석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인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변하게 된다. 정답에 대한 이해가 사뭇 예수님과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아에 대한 관념이 “사람을 위해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이었다면, 베드로의 경우엔 “로마의 압제와 가난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 어긋난 이해를 한 베드로를 묵상하며 나의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학창 시절 수학을 잘 못할 때가 있었다.
보통 수학 시험 끝 문제는 주관식이었는데, 그 주관식도 찍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간혹 1, 0, -1 중 하나를 찍으면 신기하게 맞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어느 날인가 평소에 내가 수학을 못하는 걸 아는 선생님이 시험이 끝난 며칠 후 수업 시간에 나를 지명하여, 어떻게 풀었는지 칠판에 써 보라고 주문하셨다.
물론 그 미션을 성공하지 못하여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베드로 역시 답은 맞췄지만, 그 답이 어떤 공식과 원리에서 나왔는지 몰랐던 것이다. 껍데기는 알지만 속 알맹이에 해당하는 본질이 탈락된 정답이었던 것이다.

제자 베드로에게 두 열쇠를 건네는 예수 그림. (이미지 출처 = Flickr)
아무튼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 하시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욕을 하셨다. 여기서 사탄은 누구인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 만난 자들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대답을 통해 과거 당신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광야에서 만난 사탄과 재회했다.
그 당시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는데, 마술적 몸짓으로 돌을 빵으로 만들고, 사람들의 환호와 인기를 받으며 성전 꼭대기에서 천사들의 부드러운 품에 몸을 던지는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낸 길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곧 인간들의 완고한 마음이라는 바위에 당신을 던지면 산산조각이 날 것이고, 천사들도 떨어지는 예수를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바꾸지는 못할 거지만, 자신의 몸과 피를 사랑과 희생으로 내어주어 그 자신은 빵이 되고야 만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으로 당신 자신이 배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빵이 된 자신이 쪼개어지고, 나누어져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예수님은 앞서 이야기한 요술 자판기처럼 하나를 투자해서 둘을 얻게 되는 능력을 가지셨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자판기는 나의 부와 명예, 즉 이익을 위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재능의 선물을 많은 사람을 위한 공동선을 위해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신다.
즉 우리가 신앙으로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투자한다는 것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라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탈렌트(능력)를 잘 사용하고 나눌 수 있는 신앙의 훈련과 양성(길러냄)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신기한 자판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성체 성사인 인류 최고의 하느님 사랑의 발명품처럼 우리도 세상에 누군가의 빵이 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번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는 다음과 같이 신앙 양성에 대해 선언하고 있다.
“신앙의 양성이란 세례 받은 모든 이 각자가 자신이 받은 탈렌트로 열매를 맺고 모든 이를 위한 봉사에 그 탈렌트를 사용하기 위하여 주님의 선물에 대하여 마땅히 드려야 하는 응답이다.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에 기울이신 시간은, 종종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사명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교회적 행위임을 드러낸다."(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14-1항)
최영균 신부(시몬)
수원교구 사제로서 다양한 본당에서 사목하였고,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에서 가톨릭인문종교학을 연구하며 나누는 사목생활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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