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맑힐 물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영성 - 이현주 목사​

맑은옹달샘 2023. 7. 7. 11:18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영성 - 이현주 목사

왜? 영성,영성... 하는가?

영성이라는 말이 최근에 와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통을 앓기 전에는 머리가 거기 있는지 없는지 생각지 않습니다. 눈이 아프기 전에는 눈이 있는지 없는지 별로 생각도 않고 사는데 눈이 아프게 되면 눈에 대해서 많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영성이라는 단어도 삶의 내용과 방법들이 건강할 때에는 말하지 안아도 됩니다. 많이 병들어서 문제가 생기니까 굳이 저마다 '영성''영성'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있으면 '육성'이라는 말도 있어야 할텐데 아직 못 들어보았습니다. 영이라는 말하고 아무래도 대비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물질, 혹은 육이 될 것입니다.

지난 300년 동안을 되돌아 봐도 인간의 정신적인 면의 발전보다는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발달이 굉장히 빨랐다고 생각돼요. 인디안 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다가 가만히 멈추어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면 자기 몸이 너무 빨리 달렸기 때문에 혹시 자기 영이 그 속도를 못 따라와서 날 놓치지 않았나 싶어 영이 올 때를 기다린다는 거예요.

어쩌면 지금 우리 인류 전체가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을 멈추고 기다려야 하는데 더욱 빨리 달리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영성, 영성,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안 보이는 것을 좀 잘 보면서 살자는 것이 영성이기 때문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중요한 게 많습니다. 우리가 많이 놓치고 있습니다. 제대로 살려면은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을 좀 제대로 잘 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반성이 이제 영성, 신앙, 그런 단어를 쓰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생태적 삶을 우리가 추구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영성생활이라는 것이 같은 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생태적 삶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좀 알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지크 나트 하앙 스님이 쓰신 어떤 책에 "종이 한장에서 강물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이를 본다고 물이 보입니까? 비가 보입니까? 사람들이 보입니까? 자기는 보인다는 겁니다. 비가 안 오면 나무가 못 자라고 나무가 안 자라면 펄프를 못 만들어 내고 펄프가 없으면 종이가 없으니까 결국 이 한 장의 종이가 있기까지는 비가 내렸기 때문에 나무가 있고 펄프가 있고 종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 시간이라는 것만 빼버리면 요게 바로 비다 해도 된다는 거죠.

물론 이 지구상에 사는 전체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함께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한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인류 전체의 지식이나 지능의 발달이랄까, 인류 전체의 생각이 변화되는 것과 맞물려 연관 지어질 때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 환경에 대한 관심이 두터워지면서, 우리가 어떻게 소비생활을 할 것이며 또 자연을 상대로 하는데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 것이며 상당히 인류적인 운동의식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그 동안 지나치게 물질적인 풍요와 편리함을 추구해 온 우리 인류의 유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누리고 있는 이것이 부정적인 역할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겪었기 때문에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죠. 마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그렇게 고생을 해봤기 때문에 아버지하고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나중에 깨닫는 것처럼. 안 떠났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세상에 살아도 좋은 세상인줄 모르면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이 그 동안 해온 일이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느니 하지 말고, 그런 것들도 합쳐서 우리 인류를 깨우쳐가는 어떤 밑거름이나,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지네하고 좀 덜 싸우고 파리하고 좀 덜 싸우는 것은 참 어렵더라구요.

오늘 아침에도 급한 원고가 있어서 쓰는데 파리가 서너 마리가 얼마나 성가시게 구는지, 이놈의 파리는 쫓으면 갔다가 영락없이 제 자리에 돌아옵니다. 겁도 없이 펜을 쓰고 있는 손등을 막 기어 다녀요. 요걸 어떻게 하나, 일어나서 콱 잡아버리고 말까? 그러면 내가 쓰는 그 내용하고 너무 안 맞아. 성가시고 귀찮은 것들을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수용한다고 할까? 이런 열린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추구하는 생태적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어느 소나무 하나를 만났어요. 보는 것이지요. 소나무가 아주 건강하게 잘 자랐어요. "야, 참 잘 생겼다 건강해 보이고. 비결이 뭐냐"하고 물었죠. "비결은 무슨 비결이 있냐? 그냥 아래위로 열어 놓고 살면 돼." 그래요. 그게 뭐냐 하니까 위로는 하늘을 향해 열어놓고 아래로는 땅을 향해 여는 것이지요. 뿌리가 건강하고 잎이 건강하다는 것은 열린 것이지요.

폐쇄적인 것은 병들었다는 것이지요. 건강한 사람은 다 열어놓고 살지요. 내 양심에 하나 걸림이 없다면 닫혀 놓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양심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 건강한 삶이겠지요? 보디빌딩을 해서 근육이 나오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디다 갖다놔도 전혀 감출 것이 없는 삶을 누가 산다면 저는 그 사람이야말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가 그렇더라구요. 만약에 뿌리가 대지하고 단절됐다면, 막혔다면 또는 하늘과 이 나무의 잎이나 가지가 어떤 이유로든지 막혔다면 은 이 나무는 병들어 죽겠지요. 요새 코팅 기술이 발달되었는데 누가 나무 잎을 전부 코팅해놓으면 그 나무는 금방 병들어 죽을 것입니다. 닫힌 건 죽는 것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열려있지 않은 것 같아요. 선사라든가 다른 종교의 스승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가리지 말고 열어 놓으라고 합니다.

가리지 말고..... 요것은 마음에 드니까 너는 오고 너는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너는 오지마 그런 게 아니라 어떤 누가와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간다면은 누구나 다 보낼 수 있는 그게 열려있는 것이지요. 들어왔다가 못 나가면 그건 닫혀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들어왔으니까 마음대로 나갈 수 있고 또 나가면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고 이게 열려있는 문이지요.

절에 갈 때마다 저는 일주문을 보면서 참 기막힌 아이디어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일주문이 뭡니까? 문은 문인데 문이 없잖아요. 빗장도 없지만 누가 봐도 문입니다. 그런데 열어 잠글 수가 없어요. 항상 열려있는 문이지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그게 일주문입니다.

사람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영성적 삶이요, 생태적 삶이라고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처음부터 살도록 만들어주신 그대로 살아가라는 것이지요. 억지를 부리지 말고. 움켜잡으려고 하니까 잡는 것이지요. 못나가게 하니까 잡는 것이지요. 그런 것 없이 그냥 언제든지 삼라만상이 다 터져있는 동서남북 좌우 어디를 향해서나 문이 열려져 있는 그런 인간, 혹은 인간 사회, 그것이 건강한 인간이고 생태적으로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