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한국교회

“노동자는 소모품 아닌 사람”…부당 현실 개선 위해 노력해야

맑은옹달샘 2024. 5. 2. 03:42

“노동자는 소모품 아닌 사람”…부당 현실 개선 위해 노력해야

 

[근로자의 날 특집] 고통받는 노동자, 함께하는 교회

임금 체불, 휴식 미보장, 부당해고, 산업재해…. 아직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노동자들은 고통받고 있다. 특히 산업재해는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에 예방뿐만이 아니라 사후 보상도 중요하다. 하지만 책임을 피하는 기업의 농간으로 피해를 인정받지 못해 절망하는 노동자가 많다.

5년 전 부산 경동건설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산재로 숨진 고(故) 정순규(미카엘)씨의 아들 정석채(비오·39·서울 성산동본당)씨도 아버지 죽음의 진상 규명을 위해 사측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정씨 사연을 통해 부당한 대우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전하고, 그들과 동반자로 함께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 알아본다.

부산교구 노동사목·정의평화위원회 사제단이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고(故) 정순규씨 4주기 및 부산지역 산재사망노동자 사회적참사 희생자 추모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사진 정석채씨 제공

■ 비수를 꽂던 것들

2019년 10월, 20년 이상의 건설노동 경력자였던 아버지 정씨는 옹벽을 설치하는 작업 중 비계(임시로 설치한 발판)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지고 다음 날 숨을 거뒀다. 회사 관계자들은 유가족에게 “정씨가 2미터 높이에서 떨어졌다”고만 전할 뿐, 사고가 어쩌다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사측이 최소 8가지 안전 규정을 위반했다는 전문가들 견해대로 경동건설의 잘못임이 확실했다. 아버지 정씨 휴대전화에 담겼던, 사고 1시간 전 현장 사진 속 비계에는 추락 방지 안전망도, 안전난간대도 없는 데다가 옹벽으로부터 45㎝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5일 후 유가족이 현장을 찾았을 때는 안전망이 씌워져 있었고 난간대도 설치돼 있었다. ‘추락주의’ 경고판도 붙었다.

은폐 공작은 계속됐다. 피고가 된 사측은 아버지 정씨가 친필 서명했다는 관리감독자 지정서를 법정에 제출했다. 현장 안전 관리자인 아버지 정씨가 본인 사망과 산업재해 피해에 책임이 있음을 주장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유가족이 필적 감정을 맡긴 결과 위조된 서명임이 드러났고, 하청업체 관계자는 “고인의 부탁으로 대신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의당 강은미(아가타) 국회의원의 국정감사와 여러 시사 프로그램으로 경동건설 측의 조작과 은폐 행적은 알려졌으나 유가족은 계속 싸워야 했다. 아들 정씨는 50번이 넘는 정보공개 청구와 1인 시위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2심(항소심)까지 진행됐던 형사재판에서 책임자 처벌은 집행유예에서 그쳤다. 하청업체만 검찰에 송치하는 꼬리자르기식 수사도 유가족의 투지를 시험했다.

책임 회피하는 사측

안전장치 미비로 숨진 노동자 정씨

사측은 책임지지 않으려 은폐 공작

급기야 사문서 위조 시도하다 들통

가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빈소를 다녀간 하청업체 관계자들이 “유가족이 폭력배를 동원해 폭행, 협박을 했다”고 허위 고소를 했다. “고소를 취하할 테니 아버지 정씨 사건을 종결하자”는 사측의 종용이 이어졌다. 국정감사 후에는 ‘정순규는 술 먹고 자기가 실수해서 죽었다'는 근거 없는 악성 댓글들이 달렸다.

고군분투였다. 노조에 가입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 핑계가 되기도 했고, 경동건설과 수많은 이해관계를 가진 언론사와 시민단체, 종교계에 외면받았다. “살 만큼 산 사람의 죽음을 청년들 죽음에 비교할 수 있냐”는 말은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대기업을 상대로는 안 된다’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니 싸움은 그만두고 네 인생을 살라’는 말이 가장 상처가 됐어요.”

아들 정씨는 “가까운 이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멀어지는 현실이 가장 가슴 아팠다”고 호소했다. 이어 “잔혹한 산재 사망의 현실이 시민들에게 얼마나 무감각한지 여실히 드러나는 방증”이라고 역설했다.

수도자들이 고(故) 정순규씨 유가족의 손을 잡으며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사진 정석채씨 제공

■ 교회의 동참

교회는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교회의 사목적 관심의 중심에는 더욱 시급한 노동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267항)고 언급한다.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에 대해 깊은 사목적 관심이 필요하며,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노동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어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계를 위해 열악한 조건을 견디는 나쁜 일자리가 느는 현실에서 가톨릭교회는 용기 내어 부당함을 알리고 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자 “이웃이 되어주는 것”(루카 10,35)은 성경에도 명시된 교회의 역할이다.

가톨릭교회의 동반

노동자도 하느님 모상 닮은 창조물

비정규직 등 노동 현안에 주목하며

아픔 달래주고 부당함 함께 외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위원장 김시몬 시몬 신부)도 그러한 가르침에서 원·하청 구조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사망사고, 사내 하청 불법 파견, 정리해고, 정부 주도의 노동조합 탄압 등 주요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노동 현안에 주목하고 부당함을 호소했다. 단식 및 고공 농성을 하는 노동자, 산재사망 유가족을 지원하고 돌봄노동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피정을 마련했다.

또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모임인 ‘반올림’ 농성장 지킴이들, 코로나19를 핑계로 정리해고된 아시아나케이오 항공 노동자들 등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꾸준히 연대해 왔다.

전국 사제·수도자 및 노동사목 관계자들이 보내온 ‘경동건설 신축공사현장에서 사망하신 하청노동자 고(故) 정순규님 사망 원인에 대한 명백한 진실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원하는 탄원서’들. 사진 정석채씨 제공

“교회의 연대는 힘없는 저희에게 가장 큰 방패였어요.”

아들 정씨도 “함께하는 교회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싸우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당 성가대 단원들은 같은 단원인 정씨를 위해 1주기에 부산까지 내려와 연도를 바쳤다. 다른 교구 성당들까지 발로 뛰어다니며 탄원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서울대교구의 노력으로, 집행유예로 그쳤던 1심 이후 대검찰청 앞 항소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다. 2주기부터는 부산교구에서 기일마다 추모미사를 봉헌하게 됐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전국에서 사제·수도자들이 달려와 줬고 자필 탄원서도 보내주는 등 힘을 보태줬다.

2022년 5월에는 서울·부산·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가 항소심 재판,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비난받는 가족에게 방패가 되어줬다.

현재 ‘사문서 위조 및 위조사문서 행사’ 고소로 새로운 대응을 준비하는 정씨는 “특히 연대해 주시는 수도자들 말씀에 큰 격려를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예수님도 이해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의 죽음도 그와 다르지 않지요.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계셨더라면 수도원이 아니라 형제님 옆에서 같이 피켓을 들고 시위하셨을 겁니다. 저희가 응원합니다.”

■ ‘사람’인 노동자를 위하여

교회의 역할은 노동자들은 ‘소모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 어떤 경우에도 돈이 인간의 존엄성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는 없다는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전하는 것이다.

김시몬 신부는 “이익만을 추구하면 사람에게도 효율의 잣대를 적용하게 된다”며 “저마다 일터에서 충실히 일하는 모든 이가 나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마음을 갖고 인격적인 존중과 감사한 마음을 갖는 신앙인의 모습을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여 만들어진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정부와 재계의 무력화 시도를 막고, 원·하청 구조에서 안전과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노조법 2.3조 개정’을 위한 활동도 노동·시민단체와 더불어 개선을 위한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2022년 7월 8일 서울 마곡동 아시아나케이오 본사 앞에서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김시몬 신부와 부산·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신부들이 정리해고된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들을 위한 미사를 열고 있다. 사진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제공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