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慈悲는 고운 情

가로수 그늘 걷다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다

맑은옹달샘 2024. 6. 11. 09:56

가로수 그늘 걷다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다

사랑스러운 이 계절을 떠도는 일은 행복하다. 하루하루 짙어 가는 초록빛은 생명을, 영원히 현재로 다가오는 생명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학교 졸업생과 함께 미사를 드린 후 초록 바람이 부는 가로수 아래로 산책을 하다, 어른스러워지고, 더 예뻐지고 하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다가, 새롭게 다가오는 세상을 향해, 미래를 향해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그에게서, 생명을 보았다. 생명이란 결국, 떨리는 것,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월에, 제법 볕이 뜨거운 날이면,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그 녹음 속을 신이 나서 걸어 다닌다. 그래서 유월은 아름다운 달이다.

지난번, 수도자 대표 모임에서 강의를 하는데, 나의 구약 성서 교수가 오셨다. 그분 앞에서, 구약 성서를 이야기하려니 갑자기 너무 떨렸다. 그래서 인사는 둘째치고, 얼른 내 방으로 올라와서 어디 인용하는 부분이 틀린 곳은 없는지, 개념 설명이 왜곡된 부분이 없는지를 점검했다.

강의가 끝난 후에야 나는 달려가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교수님은 강의가 참 좋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다시 연결되어서 반갑다. 꼭 연락하며 지내자” 하셨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공부를 하려고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지지해 준 분이셨는데, 공부를 마치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내게 주어진 길을 향해 한참을 걸어갔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내 삶의 자리로 돌아와 다음 미션을 기다리고 식별하면서 돌아보니, 공부를 배우고, 또 가르치는 인연처럼 소중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저 아래에 내려가 나무의 초록을 다 받아 안고 있는 물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듯 도는 물과 같아서 아래서 흐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느 것이 되었든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로마 근교 라미에서. ⓒ박정은

학문을 통한 인연이 출세를 위한 카드 정도로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 이런 학연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해를 받을까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공부하는 자세를 -자세하고, 정밀하며, 조심스럽게 진리에 다가가는- 가르쳐 준 선생님들이 그리워진다.

나의 미래를 준비시켜 주고, 또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보아 준 스승들을 가진 나는 참 복된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이제, 내 학생들이 자기 자리에서 찬란히 살아가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조금씩 나에게 길을 가르쳐 준 선생님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내 삶의 근본적 방향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지셨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정의 성사 속에서 하느님나라를 마음껏 만나기를 기대하셨겠지.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공부를 마치고, 내 나름의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내 소중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이제서야 조금이나마 나의 선생님들의 마음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조금씩 깊어 가는 초록 가로수 길을 걷다, 생명을 생각한다. 늘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오는 생명이신 주님, 그리고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묵상한다. ⓒ박정은

아직은 푸릇한 신록이었을 것 같다. 예수님의 눈에 제자들은. 삼 년간의 생활 공동체를 통해 제자들이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그 하늘나라의 신비를, 육화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협조자이신 성령이 오시면, 당신의 가르침을 알게 된다고. 그렇게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기리고, 그리고 나서,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묵상한다.

그러니까 성령의 빛 안에서만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지,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하늘나라)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첫 영성체를 하기 위해, 기도문을 외우고, 매일 미사에도 참례를 하면서 그렇게 성체성사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시간이다.

그러니 유월, 그 초록의 바람 속으로 걸어 다니는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할 일이다. 그러다 예수님의 마음은 빨강 하트가 아니라 초록빛 잎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사실 18세기에 시작되었다.

상본에서 흔히 보는 심장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이는 어떤 것으로 치환한 것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그린 그림 보는 것을 좀 힘들어 한다.

18세기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생명을 내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장에 비유했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당시에 감정, 사랑, 혹은 희생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로 심장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가령 심한 걱정이나 염려로 애태웠다고 하는 표현으로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아름다운 장미, 예수, 내 주여, 나의 맘에 향기 향기 가득하소서, 나의 일생 어느 곳을 가든지, 주님의 사랑으로 향기 내리다' 내가 여전히 제일 좋아하는 어린이 성가. 예수님 마음을 그리는 노래인데, 장미는 사실 교회 역사 안에서 늘 예수님의 마음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향기로도 그러하도, 끝없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신비로도 그러하다. ⓒ박정은

하지만, 현대인의 사고체계에서 우리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디 있으며,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마음은 단순히 심장일까 아니면 뇌의 어떤 지점일까? 마음이 어디에 있든,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하늘 마음이고, 또 작아지고 부서져서 커다란 하늘 마음이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그저 인간의 오장 중 하나인 심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사실 심장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표현하는 데 대한 나의 불편감은 비유가 가지는 한계에 있다. 'A는 B와 같다'라고 하는 비유는 A라는 요소가 B의 어떤 요소를 담보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가령 '하느님은 아버지와 같다'라는 비유에는 하느님의 어떤 속성은 아버지의 어떤 요소, 즉 가족을 돌보고, 책임지는, 또 자비롭고 너그러운,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비유가 일상의 체험과 잘 맞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유월이다. 하루하루 생명의 빛이 초록초록한 이 유월에 예수님의 맘을 묵상하고, 그분께 자주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의 공부로 딱딱해진 마음에서는, 비유의 어떤 이미지에도 갇히지 말고, 실재하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초록 바다와 같은 그분의 맘속으로 풍덩 뛰어들자고, 그래서 그 초록빛이 내 맘에 스미게 하고 싶다는 어떤 간절함이 나를 재촉한다.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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