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 왜 절해유?

<가을 단상>​

맑은옹달샘 2024. 11. 14. 19:20

<가을 단상>

가을은 먼 산에서 저 혼자 뽐내다 첫눈 내리는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무책임한 계절인 줄로만 알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빛남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일까. 가을에는 유난히 이곳저곳 산사를 찾았던 까마득한 기억들이 새롭다.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오늘따라 더욱 살갑게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순간 추억 속의 가을날들이 아프도록 그리워졌다. 무엇 하나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아닌 것이 없다.

멀리 있는 가을은 남의 가을이지 내 가을은 아니다. 다행히 서울 도심 속 곳곳에도 가을이 한창이다. 산에서 내려온 가을이 시내 여기저기를 울긋불긋하게 장식하고, 길가의 가로수들도 저마다 자기만의 빛깔로 지금이 만추(晩秋)임을 일깨워준다.

누구나 편지를 쓰고 싶고, 아무나 시인이 되는 가을이 한층 무르익었다. 듣는 노래마다 다 내 이야기가 된다. 나에게 가을을 상징하는 세 단어는 보슬보슬한 ‘햇살’과 선득선득한 ‘바람’과 까칠까칠한 ‘낙엽’이다. 서울에서 그런 동네 몇 군데를 떠올려 본다.

가을날 해거름의 삼청동 길 햇살은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광화문을 지나 조금 걸으면 닿을 수 있는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한 번에 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바람의 노래를 실컷 들을 수 있다.

나에게 서울의 가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용산에서 이태원으로 이어지는 옛 국방부 청사 앞길은 플라타너스 고목에서 떨어지는 울긋불긋한 담요 조각 같은 낙엽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에서 6호선 녹사평역에 이르는 1km 남짓한 이 길은 내가 좋아하는 드라이브 길이기도 하다. 가을 한복판 이맘때쯤이면 어른 손바닥만 한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그윽한 느낌의 신작로가 된다. 단풍과 낙엽은 같은 나뭇잎이지만 유독 가을에만 서로 다르게 부르는 이명동인(異名同人)이다.

밤중에 이 길은 아우성치는 죽은 군인들의 환영을 보는듯한 약간 으스스한 길이 되기도 한다. 2년 전 이즈음 159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영문도 모른 채 숨이 막혀 죽어갔던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이 바로 길 건너 저편이다. 내가 아는 한 이곳은 서울에서 몇 안 되는 단풍 명소다.

다만 찾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 미8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던 군사 보호구역이었던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지금은 이런저런 말이 많은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동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길을 이용해서 출퇴근하던 나는 오전 11시가 다 된 시간에 요란하게 출근하는 대통령 일행과 마주친 적도 있다.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라 제법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느꼈던 참담함과 한심함은 다시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10%대의 대통령 지지율은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더 보탤 말도 더 뺄 말도 없다. 어쨌든 가을 속의 이곳은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들의 낙엽축제 현장이다. 채 물들지 못한 큼직한 나뭇잎들의 잔해와 플라타너스 특유의 육감적인 몸매를 흘겨보는 눈맛이 미쉐린 등급이다.

곧바로 만나는 녹사평역에서 남산 2호 터널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샛노란 자태를 뽐내는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열병식을 치르는 군인들처럼 꼿꼿하게 줄지어 서 있다. 도심 속의 벅찬 가을 풍경들이 아닐 수 없다. 인근에 그 유명한 경리단길도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들이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지역이다.

현재 시각 ‘서울 속의 가을’ 혹은 ‘가을 속의 서울’은 눈부시도록 찬란하다. 덩달아 나도 철없는 문학 소년이라도 된듯한 기분이다. 까짓것 노벨문학상 작가의 소설을 아직 읽지 못했으면 또 어떤가 싶다. 가을에는 온갖 말을 다 해도 흉보는 사람이 별로 없을 듯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 가을의 시인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멋진 가을날에 절을 찾지 않는 사람은 언감생심 불자도 아니다. 당장이라도 인근의 사찰을 찾아 불보살님들께 정성껏 삼배라도 올리시길 바란다. 도심 속의 가을도 여느 유명한 산 못지않은 똑같은 가을이다.

-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명예교수 hnk@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