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福音 묵상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맑은옹달샘 2025. 6. 18. 07:28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코린9.6ㄴ-11.마태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부단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과의 결별!

유다 사회 안에서 가장 위선적인 사람들로 손꼽히는 부류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많이 배운 사람들, 고위층 인사들,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사제들!

같은 사제로서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습니다. 사제들의 삶이란 것, 쉽게 위선자로, 이중 인격자로 전락하기 쉬운 삶인 듯합니다. 항상 강론대에 서야 하고, 뭔가 좋은 말을 해야 하는데, 구체적인 삶을 따라가지 못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들도 처음에는 하느님 말씀의 성실한 전달자들이었으며 충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성전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쳤던 지식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가장 가까이 살았던 그들이 점점 하느님과 가장 멀어진 삶을 살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점점 타성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중요한 핵심은 외면한 채,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정신이나 신앙의 성장, 쇄신 작업은 뒤로 한 채,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들에만 혈안이 되었기에,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지만, 실제로는 가장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유다의 한 랍비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선적인 것 중의 십 분의 구가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강한 율법주의를 바탕으로 한 형식주의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었어야 할 제관들과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나 자선, 기도, 금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질타에 대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한 번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이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꿰뚫고 있으면서 영적인 삶과 세상에로의 투신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지 않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몰두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질타하시는 형식주의자들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위선의 극복, 그것은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위선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진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본래의 나약함과 한계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다시금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의 치명적인 결함인 위선과 이중성, 언행의 불일치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