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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한국교회

누가 이슬람 사원에서 돼지고기를 먹었나

누가 이슬람 사원에서 돼지고기를 먹었나

조승현 신부(CPBC 보도주간)

 

“만사(萬事)가 성사(聖事)”라는 말이 있다. 가톨릭백과사전에 따르면 성사(聖事)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감각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룩한 표지(標識)인데, 그 성사가 온갖 여러 가지 일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만사가 성사”라는 말은 세상 모든 곳에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우리 인간이 느끼고 깨달을 수 있도록 세상 모든 것을 통하여 보여주신다. 이제 세상 만물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성사만이 아니라 넓게 이웃 종교까지 범위를 넓히면 종교의 언어는 ‘상징’이다. 종교학적으로 종교의 언어는 ‘상징’이라고 한다. 인간은 ‘말’로 생각이나 의견을 전달하지만, 종교는 ‘상징’으로 가치나 교리를 전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상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종교의 가치와 깊이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부활과 구원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종교의 상징 또는 행위가 다른 종교나 이웃에게 불편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내 종교에는 의미 있는 상징이나 권장되는 행위이지만 다른 종교에서는 금기시하거나 불편을 주는 상징, 행위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성당에서 목탁을 두드린다거나 절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는 식이다. 조선 박해시대에 배교를 강요받은 신자들은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야 했다.

작년 대구의 한 동네에서 이슬람 사원 건립 반대 비상대책위원회가 ‘연말 큰 잔치’라는 이름으로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건설되는 현장에서 돼지고기 바비큐를 하였다고 한다.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는 것을 알기에 벌인 일일 것이다. 내가 반대하는 종교가 금기시하는 상징 행위를 이용하였다. 종교 폭력이다.

더욱이 어떤 종교를 반대하는 이유가 공포와 혐오라면 더욱 큰 문제다.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라는 말이 있다. ‘이슬람’과 공포를 뜻하는 ‘포비아(phobia)’가 합쳐진 말이다. 이슬람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혐오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대구 이슬람 사원 반대 주민들은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들어서면 동네가 슬럼화, 빈민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무슬림은 ‘빈민’이라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이슬람 국가 카타르에서 열렸고, 사우디 왕세자 빈 살만을 만나기 위해 대통령까지 나섰다. 우리 사회가 무슬림을 바라보는 혐오와 편견의 시각이 고스란히 대구 이슬람 사원 갈등에 녹아있다.

회칙 「모든 형제들」의 한국어판 표지 그림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무슬림 말리크알카밀 술탄을 만나는 장면이다. 회칙의 시작도 그 만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십자군 원정 중에 이루어진 이 만남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형태의 공격이나 분쟁을 피하고, 같은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하고 형제적 ‘순종’을 실천하라고 권고하였다는 사실에 우리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닫힌 세상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열린 세상을 상상하고 뛰어가자고 회칙에서 제안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이 가득한 곳이 이탈리아의 아시시이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이슬람을 포함한 여러 종교인이 모여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을 하고 있다. 1986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제안하여 시작했다. 각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각자의 방법과 행위로 기도한다.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고 배제와 차별이 없으며 다양성으로 공존하는 그 모습이 평화라고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새 시대의 문을 여는 것은 종교다. 일부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좌와 우의 양극 논리를 넘어서 역사의 다음 발전 단계로 ‘열린 세상’을 제시한다. 연대에 기초한 다원주의 사회이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패거리들’의 세상 너머 형제자매애에 기초한 자유와 평등으로 우리는 걸어갈 것이다. 그곳에 평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