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나요?
나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48세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 어머니의 나이는 42세. 5남매가 모두 학생이었던 시기에 어머니가 짊어지셔야했던 인생의 무게는 가히 상상하고도 남을 만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투병생활을 하시던 당시 성당에서 열린 성령 세미나에 참석하셔서 성령의 깊은 은사 체험을 하셨고, 이 힘든 시기를 오히려 당신 삶의 새로운 전환기로 사셨다. 성령께서는 어머니의 인생을 바꾸셨고, 사람들이 모두 놀랄 정도로 힘든 고통의 순간을 신앙으로 이겨내게 하셨다.
그 은총의 삶은 기도와 희생으로 이어져 숱한 시련 속에서도 재속회 종신서원을 거쳐 76세가 되신 올 해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여느 사제들의 어머니가 다 그렇듯이 내 어머니 역시 사제인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사신다. 성령의 은사도 많이 받으셨지만, 누구에게 그런 은사를 자랑하시거나, 은사를 핑계로 일상의 삶을 게을리하신 적이 없으시다.
은사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봉사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으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령을 따르는 ‘건강한 삶’이 어머니 온전히 지켜주신 셈이다.
가톨릭 교회가 성령께 대한 신앙과 신심을 잊은 적은 없지만, 신자들에게 내리는 성령의 은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통해 교회는 성령께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표징들을 읽고 새 시대에 맞춰 쇄신과 적응을 이끌어주심을 고백하고, 성령의 거룩한 은사들이 신앙인들 각자에게 주어져 있음을 천명한 바 있다.
과거 성령의 은사가 심령 기도와 같은 이상한 언어와 영적 치유와 같은 ‘비정상적인 은사’인 것처럼 오해를 받아 교회 안에서 일종의 ‘성령 알레르기’가 퍼진 적도 없지 않았다. 때로는 성령 체험이 일부 신자들을 신앙적 오류로 빠뜨려 교도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개인적인 은사 운동으로 이어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그러한 성령의 은사가 개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비술’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신자 모두에게 선사된 은총임을 자각하였다. 즉 온 인류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 은총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교회의 신자 전체가 성령의 도유를 받아(1요한 2, 20, 27) 복음을 선포하고 살아가는 예언자적 소명에 불림 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올바른 판단으로 그 믿음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믿음을 실생활에 더욱 충만히 적용”(교회헌장 12항)할 수 있게 해주는 ‘신앙 감각’을 선사하시어 일상생활 속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셨음을 강조하였다.
성령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느님의 ‘숨’, ‘기운’, ‘바람’과 같이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원천이자 삶과 신앙을 이끌어주는 힘이시다. 성령은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을 찾으며, 우리가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살며, 어두움과 죄의 암흑 속에서도 결코 길을 잃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위로자이자 협조자이시다.
많은 경우 성령의 은사를 특별한 성령 운동을 통해서 받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성령 세미나와 같은 성령 운동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성령의 은사를 다시금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지, 없던 성령을 새롭게 받자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가 전개하는 성령 운동은 돌처럼 굳어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지 못하는 우리 영혼의 깊은 심연을 건드려 다시금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없던 성령을 청원하여 새롭게 불어 넣어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일깨워주고 지탱해주는 고유한 영적 감각을 우리에게 심어주시어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에제 36. 26) 주신다.
우리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요한 20, 22) 보내주신 성령께서는 우리 영혼의 숨결과 같아 우리가 숨을 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함께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신다.
하지만 우리는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은사를 하느님께 청할 수 있다.
성령은 우리들의 일상에 숨 쉬고 계시지만, 우리가 특별히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로마 8, 26)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 체험은 강렬하다.
우리의 탄식 속에서 갈망하는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의 잠든 영혼을 일깨우고, 더럽혀진 우리 영의 어두움을 걷어주시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러한 성령의 체험은 교회 안에서 교도권의 올바른 인도와 지도에 순명하고, 공동체의 선익에 봉사할 때에만 참된 영의 은사가 된다.
성령은 결코 우리 일상을 내팽개치거나 회피하고 신앙에만 몰두하게 하는 비뚤어진 영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청하는 성령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이끌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 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부르는 이유는 우리 시대에 성령이 더 많이 활동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 시대가 너무 악한 영의 세력으로 인해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우리 안에 간직하며 살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께 더 많이 의탁하고 그 분의 위로와 도움을 더 많이 청해야 한다는 교회의 요청인 것이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서로 다른 성령의 은사를 통해 성실하게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는 올바른 영적 감각을 키워야한다. 영적 감각은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리는 성령의 숨결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우리의 영혼에게 유익한 것을 찾아갈 수 있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강렬한 체험보다는 일상 속의 성령 체험이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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