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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者의 지팡이

"믿을 만한 존재로서 교회? 부족함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을 만한 존재로서 교회? 부족함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터뷰] 전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지난해 11월 30일 퇴임하고 광주대교구 9대 교구장의 역할을 마친 김희중 대주교.

김 대주교는 퇴임을 즈음한 지난해 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사회교리”라는 책을 냈다. 그는 책에서 “복음적 청빈 정신에 입각한 교회 쇄신을 위해 재물에 대한 초대교회의 근본정신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책의 의미를 설명했다.

지난 2월 8일, 인터뷰에 앞서 김 대주교는 “요즘의 정치를 어떻게 보냐?”는 질문을 던지며, “정치에는 반대, 지지의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대안 없는 반대는 불평불만에 그치고, 비전 없는 찬성은 이기주의일 뿐”이라고 말했다.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의 철학이 없는 현실을 지적한 김 대주교는 그런 맥락에서 광주대교구 시민정치학교를 열기도 했다. 그는 “오늘의 한국 정치 현상에 대해서 정치철학적 입장에서 분석,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시민들의 정치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퇴임 뒤,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미안할 정도로 쉼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당분간은 쉬면서 지난 시간도 더듬어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보다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김 대주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에 주목한 이유, 한국 교회와 사회, 특히 남북 문제와 10.29 참사, 종교 간 일치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이 자리에는 미래세대연구자모임인 샬롬회 회원 김창영, 이전수, 이혜림 씨가 동반했으며, 인터뷰 내용은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유튜브 영상으로도 함께 제작됐다.

김희중 대주교와의 인터뷰가 2월 8일 광주대교구청에서 진행됐다. ⓒ정현진 기자

다음은 김희중 대주교와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 전문이다.

대주교님께서는 이번 책 이전에도 오래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재물관과 부의 기원'이라는 논문을 쓰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을 주목하고 천착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불평등의 상황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계층 간 불평등, 정치적 양분 등 안타까운 상황이 심화하고 있지요. 1600여 년 전 사목했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은 오늘과 유사한, 어쩌면 더 심각했던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 살피면서 우리 시대의 해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요한 성인 당시, 부자는 하늘의 별도 살 수 있을 정도였고, 가난한 이는 한 끼 식사도 어려운, 어쩌면 끼니는 제공받는 노예보다 어려운 이들이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어떻게 했는가. 복음의 핵심인 사랑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보면서 우리 시대의 해법 찾고 싶었죠. 복음의 대헌장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구체적 실천은 평등과 나눔이었고요.

사랑이 성숙하고 완결되기 위해서는 평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이 그토록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는 평등을 줄곧 강조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경제는 노예의 노동력에 의한 경제 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 경제를 떠받치는 노예들은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평등이 사랑의 핵심이었기에 노예 출신이 교황이 될 수 있었습니다.(222년 경 갈리스토 1세 교황) 당시 노예 출신이 귀족들을 가르치고 훈육한 것은 엄청난 혁신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나눔입니다. 성 요한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공동체성을 복원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특히 정의에 대한 관념, 법에 대한 관념, 그러나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를테면 노예를 방면하도록 한 것 같은 일들이지요. 그러나 노예를 방면할 때도 자활할 기술과 자금은 마련해 주도록 했습니다. 당시와 현재는 형식적으로 같지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전통적 미덕인 대동 사회의 회복, 요한의 가르침이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는 가르침인 이유입니다.

대주교님께서는 책을 통해 다시 시대의 징표,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에 대해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읽고 또 성인처럼 구체적으로 잘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언어가 여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아쉬움도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오래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2014년, 한국주교단의 교황청 공식 방문 당시 교황에게도 말씀드렸는데,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교리의 내용이 너무 어렵고 추상적이니, 교회 교육의 방식과 내용을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목자의 설교가 아주 현실적이고 신자들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성찰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설교 방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농촌 지역에서는 농사에 관계된 이야기로, 어촌에서는 어부의 이야기로 가르쳤는데, 그만큼 일반 사람들의 삶과 깊이 연관 맺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큰 틀에서 시대의 징표를 안다는 것, 교회에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교회가 맞추려면 시대의 근본적 문제를 관통해야 합니다. 시대의 아픔에 적극 동참할 때, 그 시대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언어는 조금 더 간단하고 명료하고 쉬워야 하고,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픔과 문제에 공감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인간 세상에 왔던 것처럼. 강생의 의미는 하느님이 인간을 극도로 사랑해서 인간으로 왔고 그들의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며,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인의 가르침 중에 “부의 문제”와 관련해, 일반 사람들에게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부유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 의미에서 교회가 스스로 가난해지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가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태도는 어떠하다고 보시는지요?

부라는 단어의 언어학적 기원은 ‘넘치다’ 입니다. 그릇에 넘친 물은 쓸모가 없지요. 부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마치 부는 악하고 가난은 선하다, 부자는 나쁜 사람, 가난한 사람은 축복받았다고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부는 그 쓰임에 따라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습니다. 강도의 손에 들린 칼은 흉기지만, 요리사나 의사의 칼은 생명을 살리는 칼이죠. 부 자체를 선과 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진 부, 그것을 교회가 교회 자체만을 위해 쌓아 둔다면 문제입니다. 하지만 활용하기 위해서 관리하고 있다면 그것을 나쁘다고 볼 수 만은 없습니다. 다만, 그 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요한 성인이 강조한 것도 관리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관리를 맡았을 뿐이라는 것, 그러면서 토지공개념, 부의 공유를 강조했습니다.

지난 10월 워싱턴에서 만난 한미주교단. (왼쪽 네 번째가 김희중 대주교) (사진 제공 = 워싱턴 공동취재단)

대주교님은 얼마 전, 북미, 남북 문제를 위한 교회의 구체적 노력의 하나로 미국 주교단을 만나신 바 있습니다. 그 뒤 여러 정세의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특히 남북 문제,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국내 문제 차원에서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불안한 동거생활을 할 것인가. 남북이 서로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의 위협 없이 남북이 화해하고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물리적 파괴뿐 아니라 인간의 윤리, 양심도 파괴되지요. 신학생일 때, 월남전에 참전한 적 있는데, 전쟁에서 모든 선은 생존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도 용인되는 것이 전쟁이고, 인간성도, 윤리도, 양심도 없습니다. 그런 전쟁을 우리가 목전에 두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고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왕래하다 보면 합일점에 이를 거예요. 마치 수위가 다른 강에서 배가 오가기 위해서 수위를 맞추듯이 말이죠. 그렇듯이 당장 남북 간 화학적 합치나 물리적 통일보다는 서로의 평화공존, 남북이 서로 오가면서 사상과 경제가 수위에 맞춰지고 존중하면 어떨까요.

지금 상태에서는 강대국이 분단 상황을 이용할 위험이 늘 있습니다. 남북 간 관계를 양비론이 아니라 한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국제적 연맹이나 연합도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깨질 수 있지만 민족 공동체의 결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단지 민족 이기주의나 이익이 아니라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지난 10월 미국 의회, 미국 주교단을 방문했을 때, “한반도의 평화가 절대 다른 이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이상적 가치는 홍익인간이다.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근본적 심성이다. 한반도 평화가 동북아의 평화이고, 동북아의 평화가 세계평화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미국이 70여 년 북한을 적으로 설정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미국 국무부이나 주교회의 의회에서 “프랑스나, 인도, 영국의 핵이 미국에 위협이 되는가? 오히려 미국의 전략적 자산 아닌가? 왜 북한을 적으로 두는가. 북한의 선의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우방국으로 받아들이면 무슨 문제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만약 한반도 철로가 개통돼 미국에서 기차를 타고 캐나다를 거쳐 시베리아를 관통해 한반도까지 이를 수 있다면, 태평양 연안의 물류 문제가 해결됩니다. 한반도를 통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 형성되고 물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경제적 차원뿐 아니라 다양한 소통, 교류가 이뤄지면 서로에게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북미 관계에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전쟁의 위협에서 특수를 노리려는 일부의 경제적 이득보다는 미국 전체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김희중 대주교님도 10.29참사 분향소에 다녀오셨고, 또 교회의 여러 어른도 현장에 다녀가셨습니다. 2014년 세월호 당시 참사 현장 관할 교구장으로서 많은 일을 하셨고, 또 겪으셨는데요. 그 일에 비추어 10.29참사를 겪고 있는 직접적 당사자와 이 사회에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이 치유되고 평화를 찾도록 모든 이가 함께할 때, 사회가 안정됩니다.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 규명은 행정 당국에서 정말 정직하게 해야 하고, 나머지 국민은 공동체성, 대동 사회 정신을 발휘해서 돌아가신 이들의 명복을 빌고, 부상자의 치유를 빌고,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보듬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이란, 함께하는 것이라고 교황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울고 있는 이에게 왜 우냐고 묻기 전에 옆에서 함께 울어 주고, 함께한다는 마음이 통할 때, 사랑이 시작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요즘도 매일 미사 때, 세월호와 이태원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모두 함께해 줄 때 고통받는 이들의 치유가 더 빨리 이뤄질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고독한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혼자 있다는 외로움과 고립감입니다. 두번 다시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다 촘촘한 매뉴얼을 만들어서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또 되풀이된다면 무가치한 희생만 생길 것입니다.

한국 사회도 다양한 종교가 함께 공존하는 사회입니다. 종교 간 일치를 위한 활동에 몸담고 계신데요. 한국 사회의 종교 다양성 그리고 이런 상황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우리 각자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설령 내가 믿는 신앙이 최고라고 해도 상대방이 믿는 신앙을 폄하하고 비판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내 신앙의 기준에서 이웃 종교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들의 신앙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그림을 보면 여러 색이 있고 어떤 색이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색을 조화롭게 쓸 때, 아름다운 그림이 되고, 많은 악기가 조화를 이룰 때, 오케스트라가 됩니다. 생각과 지향이 달라도, 화합할 수 있도록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상대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느냐가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신앙을 달리하는 이웃 종교의 신자들도 인간 자체로 존중하고 배려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한 같은 피조물, 가족이기 때문이고, 생각이나 입은 옷이 다르다고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대한 인간적 배려, 정, 존중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면 신앙이나 의견이 달라도, 무조건 선과 악을 갈라 판단하기보다 기다려 주고 혹시 배울 것이 있을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이웃 종교가, 이웃 종교에 없는 것을 내가 갖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인간 존재 자체로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인권의 기본 개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의 기본은 자비이며, 자비를 근거하지 않은 정의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요한 성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 범그리스도교에 대한 신뢰도 등이 과거 20년에 비해 떨어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믿을 만한’이라는 기준에서 믿을 만한 존재로서 회복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신앙과 일상 삶이 유리되지 않아야 하고, 신앙이 일상에서 강생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예수는 그것을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일상생활에 육화의 신비처럼 강생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고,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부족함에도 부족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거나 위선적인 것이 문제지 솔직해진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말하고 가르친 내용을 그대로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내가 받은 잔은 커피잔인데, 커피잔에 한 말의 물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내 그릇은 커피잔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UiStbIV7_o (인터뷰 1편)

https://www.youtube.com/watch?v=f5zfDmax3p8 (인터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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