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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곰삭한 맛

<인간의 수치심>

<인간의 수치심>

구상

 

〈부끄러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기억이라도 하는가?

그대들이 철들 무렵

어머니가 에비라고 하신

꽃병 같은 것을 깨고 나서

처음 느낀 바로 그것,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금하신 열매를 따먹고

무화과 잎새로 알몸을 가린

바로 그런 것 말이다.

인간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맨 먼저 느끼는 것은 부끄러움!

그것은 인간 양심의 증표요,

그것은 인간구원의 싹수다.

그런데 오늘날 그대들은

잘못을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죄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움을 안 갖는다.

그것은 그대들의 양심이

마비된 증표요,

그것은 그대들이

멸망으로 가는 징조다.

〈수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을

기웃거리며

부끄러움을 아는

동물을 찾고 있다.

여보, 원정(圓丁)!

행여나 원숭이의

그 빨간 엉덩이짝에

무슨 조짐이라도 없소?

혹시는 곰의

연신 핥는 발바닥에나

물개의 수염에나

아니면 잉꼬 암놈 부리에나

무슨 징후라도 없소?

이 도성 시민에게선

이미 퇴화된 그 부끄러움을

동물원에 와서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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