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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곰삭한 맛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나는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진실로 나는 세상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나는 진리를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진실로 나는 진리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나는 인생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진실로 나는 인생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나는 죽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진실로 나는 죽음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아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보이는 것뿐그러나 진실로 그 안에 있는 의미(意味)를 나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글 : 김용해(요한) 시인 더보기
<사랑>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정호승 더보기
<맑은 물>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 준다 만상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 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오히려 더욱 맑게 고이는 그대 모습 만나지 않았는가 ​- 도종환 시인 더보기
<사랑의 길>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 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 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 도종환 더보기
<하늘> ​언제나 하늘은 거기 있는 듯 언제나 하늘은 흘러가던 것 ​아쉬운 그대로 저 봄풀처럼 살자고 밤에도 낮에도 나를 달래던 그 너희들의 모양도 ​풀잎에 바람이 닿듯이 고요히 소리도 내지 않고 나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 너희들의 모양도 ​구름이 가듯이 노을이 가듯이 언제나 저렇게 흘러가던 것 ​-김춘수​ 더보기
< 뜰 > ​외로운 섬이 떨군 별들은 파도에 실려 뜰에 이르곤 할게야​그걸 보고 수평선은 밀물을 보내 뜰의 얼굴을 깨끗이깨끗이 씻어주고는, 썰물을 보내 뜰을 토닥토닥 재우곤 할게야​그대의 발자욱에 가슴 눌린 뜰엔 늘 눈부신 별이 파르르파르르 떨어져 누울게야 ​- 강은교 더보기
「현실 인식과 시대정신」…20주기 맞은 구상 시인 색다른 문학 세계 첫 선 「현실 인식과 시대정신」…20주기 맞은 구상 시인 색다른 문학 세계 첫 선​한명수 정리·지음 / 304쪽 / 1만8000원 / 예다인고(故) 구상 시인(요한 세례자·1919~2004) 20주기 기념사업으로, 그가 쓴 글 가운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발굴 작품들이 세상으로 나왔다. 기존에 발간된 구상 시인 전집이나 총서에 묶여 있지 않은 산문과 사설 등 그가 초기 활동에 남긴 다양한 형태의 글들이 담겨 있다. 책에 실린 내용은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한명수(미카엘) 씨가 십수 년 동안 수집해온 작업 결과의 일부다.(본지 2024년 1월 14일자 21면 보도)​책에는 구상 시인의 미발굴 시와 산문, 평문, 사설, 대담 등이 구분 지어 실려 있다. 각 작품 앞에는 발표 배경과 관련 내용, 작품 뒤에는 한 시인이.. 더보기
<그 담쟁이가 말했다> ​나는 담쟁이입니다. 기어오르는 것이 나의 일이지요.나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길며 튼튼한 담쟁이 줄기를 이루는 것입니다. ​옆 벽에도 담쟁이 동무 잎들이 기어오르고 있었지만 내가 더 길고 아름답습니다. 내 잎들은 부챗살 모양입니다.​오늘도 그 사람이 보러 왔습니다. 나는 힘차게 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나를 바라보다가 벽의 어깨를 한 번 쓰다듬 고는 떠나갔습니다.​나는 부챗살로 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주홍빛 아침 해가 내 꿈밭 위에서 허리를 펼 때까지. 아아,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담쟁이 줄기가 될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강은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