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牧者의 지팡이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

제54차 세계 평화의 날(2024.1.1.)

교황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당

2024년 1월 1일 월요일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새해의 시작을 이렇게 비춥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티아서 4,4). “때가 차자”라는 표현이 마음을 칩니다.

고대에는 항아리를 채우고 비우는 것으로 시간을 측정했습니다. 즉, 비어 있을 때 시간의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었고 다 찼을 때 끝났습니다. 바로 여기에 때가 차다가 있습니다. 역사의 항아리가 가득 채워질 때 하느님의 은총이 넘쳐 흐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시고 마리아라는 한 여성의 표징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입니다 즉 그녀는 많은 사람들과 세대들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을 준비한 그 도착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시간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통해서 여성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기뻐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성경은 태초, 창세기로 우리를 다시 돌려 보내고 그리고 아기 예수님과 함께 성모님은 새 창조,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신다고 우리에게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때에 관한 원리에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거룩한 어머니가 계십니다.

새해가 성모님께 간청는 가운데에 열리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에페소의 한 때-그때 그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했습니다-와 같이 믿음의 백성은 기쁨으로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님을 선포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사실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연약한 아기이신 주님, 하느님께서 우리의 인성과 영원히 일치를 이루시고 더 이상 인성이 우리의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기도 하다는 기쁜 확신을 표현해 줍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와 하신 주님의 영원한 계약을 고백하는 작은 말. 하느님의 어머니. 그것은 믿음의 교의이지만 이 “희망의 교의”는 순수합니다. 영원히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 천주의 성모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 바오로의 글은 두 번째 보내심을 더하여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티아서 4,6[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한 성령님을 보내심 안에서는 성모님이 주인공이십니다. 수태 고지 때에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임하시기 시작하십니다(루카 복음 1,35 참고), 그리고 교회가 시작될 때 ‘어머니 마리아와’(사도행전 1,14) 기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도들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마리아님의 받아들임은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왕이신 주님을 우리의 형제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Tommaso da Celano, Vita seconda, CL, 198: FF 786)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성령께서 “아빠! 아버지!”(갈라티아서 4,6)라고 외치시도록 해 주십니다. 마리아 님의 모성은 하느님의 아버지로서의 [그 부드러운] 다정하심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가장 가까운 길,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쉬운 길.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즉, 가까움과 연민과 [그 부드러운] 다정하심. 성모님께서는 사실 처음부터 믿음의 마음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것은 이론이나 임무가 아니고 그것은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만드는 한없는 선물이고 성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거처로 만들어 주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을 우리 자신의 삶으로 맞이하는 것은 경건함의 선택이 아니라 믿음의 필수 조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성모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성 바오로 VI세, Omelia a Cagliari, 1970년 4월 24일). 즉, 마리아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자기 자신의 여성적인 얼굴을 재발견하려면, [마리아님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형상이자 모범으로 나타나시는 동정녀이자 어머니이신 그분을 더 많이 닮으려면 [교회는] 마리아님이 필요합니다( Lumen gentium, 63 참고).

여성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보살핌과 상냥함 그리고 인내와 어머니의 용기로 이루어진 사목활동을 통해서 비옥해지기 위해서. 세상이 평화를 찾기 위해서 폭력과 증오의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돌아가 진정한 사람으로서 바라보고 바라보는 진정한 사람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성모 마리아님이 필요한다.]

그리고 모든 사회가 선물로서의 여성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성을 환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 여성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여자에게서 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존중하고 보호하고 소중히 여기십시오.

때가 차면 그 여인이 결정적인 분이신 것처럼 마리아님은 우리 한 사람한사람의 삶에서 결정적인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녀들의 긴급함과 그 때를 어머니보다 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시작”을,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그곳에서 포도주가 부족한 것을 아시고 그분께 데리고 가신 것은 먼저 마리아 님입니다(요한 복음 2,3 참조). 성모님께서 예수님이 개입하시도록 하신 것은 자녀들의 부족함[결핍]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요한 복음 2,7). 우리들의 부족함[결핍]을 알고 계시는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은총이 넘치도록 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가득 채워짐으로 데려 가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부족함, 외로움, 텅 비어 있음[공허함]이 있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바로 그러합니다. 마리아님, 채워짐[충만함]의 어머니 마리아님이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채우겠습니까? 우리 자신 안에 우리를 가두어 놓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성모님께 갑시다.

삶의 매듭을 풀지 못할 때 성모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읍시다. 평화가 없는 텅 빈 우리들의 시대는 인류 가족을 다시 결속시킬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일치의 건설자가 되기 위해서 마리아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창의성으로 그렇게 합시다. 성모님께서는 그들을 모아 위로하시고 그들의 슬픔을 들어주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토록 다정한 이콘 젖먹이는 동정녀(Virgo lactans [dell’Abbazia di Montevergine])를 바라봅시다. 이토록 엄마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다정하게 돌보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지요. 성모 마리아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새해를 하느님의 어머니께 의탁합시다. 우리들의 삶을 성모님께 봉헌합시다. 성모님께서는 다정하신 부드러움으로 그 충만함을 드러내실 줄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고 그 예수님께서는 때의 참, 때의 채워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시대의 채워짐, 우리들 시대의 채워짐, 그리고 우리들의 각자의 때의 채워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 보내어 진 것이 때가 찼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아드님을 보내심으로 때가 차게 하셨습니다” (cfr M. Lutero, Vorlesung über den Galaterbrief 1516-1517, 18). 형제 자매 여러분, 올 한 해가 주님의 위로로 가득 채워지기를! 올 한해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의 부드러운 다정하심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그리고 지금 모두 함께 세번 이렇게 외치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함께 외칩시다. 천주의 성모님! 천주의 성모님! 천주의 성모님!

(번역 2024. 2. 13. 화요일 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