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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탕자의 비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루카15.1-3.11ㄴ-32)

 

<탕자의 비유>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며느리가 요즘 성당에 다니는데, 글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하대.”

이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들이 “아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험하게 죽었대?”라고 묻자, 할머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어. 글쎄 우리 며느리가 매일 십자가 밑에서 가슴을 치면서 ‘제 탓이오’를 외치는 거야. 이 모습을 보니까 며느리가 이 죽음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지? 신고해야 할까?”

잘 몰라서 하는 대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은 며느리의 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역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이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탓이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탓을 외치면서 울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에 쉽게 빠져드는지, 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 것을,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 말씀을 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의 모습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이 비유 말씀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작은아들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을 떠나서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큰아들 역시 방황 중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고 스스로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우리입니다. 외적으로도 방황하지만, 내적으로도 큰 방황의 삶을 삽니다. 아버지 집이 그렇게 좋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삶만 살려고 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황을 멈추고 이제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

오늘의 명언: 진정한 사과는 먹구름을 걷어내고, 거친 바다를 잠잠하게 하며, 새벽의 부드러운 빛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한 사람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첼 E.굿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