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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人의 삶

예수의 복음에 대한 단상

예수의 복음에 대한 단상

이 짧은 글에서 예수 복음의 전모를 밝힐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복음은 살아 움직이는 무엇이어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리고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과 태도에 따라 다르게 실천되고 해석된다.

신앙인은 흔히 예수의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 여기고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복음의 근간을 알려 주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보다는 내가 소유한 아파트나 주식에 관심이 더 가기 십상이며 어쩌다 가격이 오르면 마치 진짜 복음이라도 만난 듯 기뻐한다.

어쩌면 이처럼 쉽게 대박을 맞는 게 대다수 우리에게는 복음보다 더 복음처럼 다가올지 모르겠다. 이러한 처세가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예수의 복음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것을 신앙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파트 가격이나 주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현명하게 투자하여 재산을 축적해서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라는 것이 예수의 복음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예수의 복음에 대해 진지한 사색이나 실천을 해 본 적이 없다면, 그리고 복음을 근거로 결정적 식별이나 판단을 해 본 경험이 없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교리교사 등에 의해, 심지어 교도권이나 자기 자신에 의해 왜곡된 복음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한편으로 복음을 왜곡해 온 역사이기도 하며 여전히 곳곳에서 왜곡이 진행 중인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기쁜 소식이라는 복음을 고민 없이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예수의 복음은 우리에게 기쁘기보다는 불편한 소식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복음은 때로 우리의 모든 것,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뒤로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목숨일 수도 있고 때로는 힘들고 외로운 투쟁일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현재까지 내가 믿어 온 하느님이나 예수님일 수도 있다.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나 아닌 다른 무엇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감행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복음의 본질 중 하나는 타자를 향해 몸을 주고 피를 쏟는 것이다. 이것을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축복과 천국을 말하면서 흔쾌히 기쁜 소식이니 믿으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은 일단 의심해 봐야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복음은 무엇보다도 걸레처럼 짓밟히고 어쩔 수 없이 낮은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한 소식이다. 예수께서 그들과 동일시했던 까닭에 그들이 예수와 다르지 않다는 신앙이 발생했다.

예수의 복음이 복음인 이유는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을,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빛을, 억눌린 이들에게는 자유를 약속했기 때문이다.(루카 4,18)

그러나 그러한 처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여기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를 위한 생명의 복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구든 복음을 삶의 안내자로 삼을 때에는 불가피하게 어떤 불안과 결단이 따른다.

예수는 가는 곳마다 불안을 일으켰다.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게라사의 주민들은 예수가 멀리 떠나기를 원했다.(마르 5,1-20) 예수의 독특한 처신은 제자들의 가정뿐만 아니라(마르 10,29-30) 예수 자신의 가정에도 분열을 일으켰다.(마르 3,20-21. 31-35) 예수라고 해서 불안과 결단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겟세마니의 저 불안과 결단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복음은 실천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다. 복음이 여는 세계는 실천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여태까지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해 많은 신앙인을 가까이서 보았지만 예수의 복음을 진지하게 자기 삶의 방식으로 삼은 이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복음을 살고 구현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자본 중심적인 성직자나 수도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신앙인과 신앙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별 차이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아마도 내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신앙인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직주의적 영성은 여전히 우리의 삶과 노동에 기반한 일상의 영성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성직자는 가르치며 평신도에게 수용할 것을 내비친다. 그것도 예수나 복음의 이름으로. 사제복이나 수도복을 입으면 어딘가 폼나게 보이는 것 같다.

주교는 사목 교서를 내고 사제들은 미사 때 그것을 아무런 성찰이나 해석 없이 반복해서 들려준다. 복음에 근거해 장상과 하느님을 구별하고 그것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어느 사이엔가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위장된 맹종이 그리스도교적 미덕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여러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평신도 신학과 평신도 영성이라는 말, 밥과 쌀의 하느님이라는 말, 고단한 노동의 하루라는 말은 한낱 수식어에 불과해 보인다.

장상은 하느님이 아니며 평신도는 성직자의 하위 개념이 아니다. 성직자가 평신도를 위해 있는 것이지 평신도가 성직자를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예수의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듯하다. 다른 누구의 삶이 아닌 내 삶이 복음을 바탕으로 꾸려져 왔다면 이런 글을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수십 년 신앙생활 끝에 다시 복음을 묻게 되고, 적지 않은 시간을 신학 공부에 쏟은 끝에 다시 복음을 묻는 마음이 적막하다.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