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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堂-감사 찬미 제사

연중 제18주일

연중 제18주일

생명의 빵, 죽음의 빵
(탈출 16,2-4.12-15.에페 4,17.20-24.요한 6,24-35)

루카 시뇨렐리 <성체를 받아모시는 제자들>

오늘 복음은 ‘빵’이라는 주제로 대화가 펼쳐집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식이나 한 끼 대용으로서의 빵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었습니다. 성경에 500회 이상이나 등장하는 빵은 ‘음식’, ‘양식’, ‘끼니’를 두루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빵은 ‘일용할 양식’으로 치환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빵이 생명 충족을 위한 주요한 공급원임을 생각할 때 오늘 복음 말씀은 ‘양식’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생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애타게 찾는 군중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군중이 서둘러 배를 타고 이곳저곳 그분이 계시리라 짐작되는 곳으로 다급히 찾아가는 모습과 발 빠른 대응에서 그들의 초조함을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애타게 찾는 행위와 동기를 부정적으로 인지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찾음이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며 빵에 마음이 팔린 불순한 동기를 들추시기 때문입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속에 깃든 표징을 깨닫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참된 신원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그분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찾음은 단지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며 육체적 만족에 빠진 이들에게 일침을 날리신 것입니다.

군중이 ‘빵의 기적’에서 드러난 표징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생명의 빵’이 아니라 ‘죽음의 빵’을 원하고 있음을 꼬집는 말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6,26-27).

주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반복하시며 시작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중요한 가르침이 뒤따릅니다. 이 말씀에서 군중들의 태도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했던 행위임을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원의가 생명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들이 만족할 수 없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언제든 돌아설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준엄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빵이 없는데도 그래도 나를 믿고 따를 것이냐?”하고요.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구하려 애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군중은 묻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6,28) 그들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적인 업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대가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성취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6,29)

예수님의 이 말씀에 군중은 믿음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눈도장으로 확인할 표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기적처럼, 그와 같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표징을 보여서 믿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생명의 빵과 만나를 비교하여 깨우쳐 주십니다.

만나와 생명의 빵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늘의 빵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고 하시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빵’에 대하여 알려주십니다. 참된 빵은 하느님의 빵으로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빵과는 달리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군중들이 그 빵을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존재를 밝히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에고 에이미’(ἐγὼ εἰμί)는 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되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이며 너희는 가지다’, 또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등의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에고 에이미’의 선언 후에는 언제나 관계성과 응답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는 주님의 이 말씀으로 하느님의 빵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임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빵은 양식이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빵은 희생의 상징입니다. 희생으로 빚어졌기에 이 빵은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믿음의 대상과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신을 식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유일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제대라는 식탁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셨고 생명의 빵이 되어 우리를 살게 하는 양식이 되십니다.

생명의 빵과 죽음의 빵,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려보면 ‘생명의 빵’과 ‘썩어 없어질 빵’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전체는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황소처럼 느릿느릿한 호흡으로 엇박자를 타며 ‘생명의 빵’과 ‘죽음의 빵’을 대조하는 특유한 전개로 흥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언제나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의 빵을 영적 양식으로 삼는 우리이기에 우리가 머무는 자리에서도 생명의 기적이 계속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