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마리아의 생애에서 가장 먼저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교의로 선포됐다. 그만큼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5세기까지 동방교부들은 마리아가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리게네스는 마리아가 신앙인의 모범이 되지만 처음부터 그 성덕이나 믿음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바실리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 치릴로 또한 마리아가 신앙의 회의와 어둠을 겪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구원 경륜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 찬양했다.
서방교부들의 생각은 달랐다. 암브로시오는 처음부터 마리아를 완벽한 여인이었다고 했다. 나아가 마리아의 완벽한 성덕을 바탕으로 무죄하다고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마리아의 순종과 그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마리아가 죄 없이 잉태됐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중세에서도 이 논쟁은 이어졌다. 안셀모,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등 여러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마리아가 원죄 속에 잉태됐지만, 모태에서 원죄로부터 정화됐다고 믿었다.
안셀모의 제자이자 영성 저술가 에드머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믿음을 주장했다. 이에 당시 많은 신학자들은 우려를 나타냈지만, 일반 신자들의 호응도는 커져 갔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에 큰 영향을 준 신학자는 프란치스코회 중세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다. 그는 ‘선행 구속’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스도의 구원 중개 능력이 단지 원죄의 정화만이 아니라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는 데에도 효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 중개가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이후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마리아 신심과 공경은 많은 비판을 받고 위축됐다. 하지만 이어진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마리아 신심은 더욱 강화됐고, 19세기까지 이어진 성모 발현으로 마리아 신심은 촉진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성모 승천’에 대해 신학적으로 더 깊이 논의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7~18세기 13명의 교황들은 성모 축일을 장려하면서도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로 선포하지는 않았다. 1840년에는 10명의 프랑스 대주교들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게 공동 서한을 보내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로 선포할 것을 요청했다. 도미니코회 회원들도 이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비오 9세 교황은 이전 교황들과 달리 교의 선포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비로소 1854년 칙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을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로 선포했다. 둔스 스코투스의 ‘선행 구속’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가 모든 인간의 구원 필요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구원의 보편성이 합치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곧 하느님은 마리아를 죄로 향하는 근본적인 경향으로부터 특별히 보호하심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는 사실이 교의로 선포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해 자신을 ‘원죄 없으신 마리아’로 밝히면서 확증됐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는 한국교회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한국 신자들의 성모 신심을 칭송하면서 1838년 교황청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3년 뒤인 184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 수호성인으로 성 요셉과 함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선포했다.
1898년에는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정했다. 1954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교리 선포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를 성모님께 다시 봉헌했다.
대희년이었던 2000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성모님께 한국교회를 봉헌했다.
한편 각 교회는 한 분의 수호성인만 모신다는 교황청 경신성사부의 권고에 따라 2015년부터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만을 한국교회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됐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