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에페5.21-33.루카13.18-21)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요즘 어떤 도시에 있는 어떤 빌딩이 더 높은 가에 관심이 쏠리듯, 세상은 갈수록 더 높고 더 넓고 더 큰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고 높은 것이 참으로 완벽하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틈을 내서 제 고향에 있는 선암사를 다녀왔는데, 예전과 달리 공사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공간이 협소해져서 열림보다 닫힘, 편안함보다 답답함을 느끼며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듣자마자 먼저 다가오는 책 제목이 있었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 표현은 이젠 일반적인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광고를 비롯해 눈길을 끄는 표제어로 즐겨 사용되고 있으며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상징하는 문장으로도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3년 E.F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라는 책을 내기 전까지는 어떤 누구도 이 표현을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열심히 선포하셨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눈에 보이는 결과도 미미하고 사람들의 변화 곧 회개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생각했던 하느님 나라와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차츰 낙담하고 실망하는 기색이 농후해지는 것을 예수님께서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 初心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되잡으시기 위해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13,18.20)라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시면서 오늘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겨자 나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많이 나는 일년생 식물이며 본디 들판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13,19)라는 표현에서 들판에 자라는 겨자를 자기 텃밭에 의도적으로 심었다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들판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겨자 나무가 아니라 농부, 곧 예수님 당신과 복음 선포자들이 정성 들여 자신의 정원에서 가꾸는 것이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농부가 정성 들여 가꾸고 돌볼 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13,19) 성장한다는 것을 또한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거대하고 거창한 삼나무가 아니라 시작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 1mm도 채 되지 않지만, 정성을 들여 가꾸다 보면 2m가 넘는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루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씨앗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씨 안에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면, 햇빛과 물 그리고 거름이 주어지면, 자기의 본래의 모습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은 굳이 추리해 보자면, 그늘이나 쉼터가 필요로 하는 곧 하느님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는 세상에서 작은 자와 버려진 사람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부류의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겨자씨의 비유는 남성적이며 일반적인 외적 노동으로, 누룩의 비유는 여성과 일상적인 가사 활동에서 차입했다고 강조하더군요. 이로써 예수님은 상당히 여성 친화적인 분으로써 여성의 가사 활동을 잘 알고 계신 것뿐만 아니라 이를 중요시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누룩의 비유의 메시지도 겨자씨의 비유와 동일합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13,21) 사실 적은 양의 누룩을 밀가루 서말 속에 집어넣으면 처음엔 전혀 보이지도 않지만, 누룩이 발효하기 시작하면 밀가루 서 말이 점차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처음에는 미미해서 보이지 않지만, 차츰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철저하게 퍼져나가고 확장해 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낙담과 실망에 빠진 제자들을 혼란에서 일으켜 세우는 희망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겨자씨는 외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누룩은 내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는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쉴 곳을 찾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의 쉼터가 되기 위한 겨자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참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품고,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가 먼저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13,21)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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