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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人의 삶

<새 삶의 가장 긴요한 물음>

<새 삶의 가장 긴요한 물음>

 

현대시의 시조라고 불리는 샤를르 보들레르의 유명한 단상집(斷想

集)인 《나의 벌거숭이 마음》의 13장을 보면,

"우리 생활의 거의 전부는 실로 부질없는 호기심을 채우는 데 낭

비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호기심을 가장 자극해야 할 문제들은

이와 반대로 세상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판단으로는 아무런 호기심도

일으키지 않는 것 같다." 라고 전제하고, 인간이 가장 호기심을 가져

야 할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즉, 첫째로는 "우리의 죽은 벗들은 지금 어느 곳에 가 있을까?"이다.

제아무리 삶에 도취하여 죽음을 잊고 사는 사람이라도 자기의 남

편이나 아내, 부모와 형제, 또는 다정한 이웃의 죽음 앞에 서거나

그 추억 속에서 이러한 물음을 체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상실케 된다는 것에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느끼며 내세(來世)에서의 재회를 소박히 비는 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물음이 마침내 자기 스스

로가 죽은 뒤에 어떻게 될까에 이르면 제아무리 무신론(無神論)이나

내세 허무론을 표방하는 사람이라도 불안이 따르고 번민에 사로잡이

기 마련이다.

두번째로 보들레르가 제기한 것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기 사는가 ?" 로서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인

생의 목적은 있는가 ?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 일 것이다.

이 물음에 놓고 대부분의 사람은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러나 우

선 대답만은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은 일을 해서 업적

을 남기려고 태어났다' 고도 해보고 '이름을 떨치고 남기기 위해서

다' 라고도 할 것이다.

또 '처자식 때문에 산다'든가, '죽지 못해 산다'는 등 생활의 체

념이나 삶의 비명을 쏟아놓기도 한다. 여하간 우리는 이렇듯 삶의

첫째 물음들을 등한히 하고 있거나 회피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외에도 보들레르는 인간의 기원이라든가 자유의 문제, 인간이

살 수 있는 천체의 수효 등 기발한 문제들을 내놓았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상과 같이 실제 우리가 조금만 캐고 보아도 인간

의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들이 그의 말마따나 '허접스러운 일상적

호기심' 때문에 고스란히 망각되어 그날 퇴근 후의 레크리에이션이

나 저녁 식탁의 찬거리보다도 무관심 상태에 놓여 있으며, 또 이런

삶의 방심상태에서 모두 잘도 살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마저 금할 바

없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대 자체를 '존재 망각의 밤'

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특히 오늘의 우리 한국인들에게 해당되는

말로서 가령 요즘 어떤 자리에서 누가 보들레르가 쳐든 물음과 같은

인생론이라 존재론 같은 화제를 내놓으면 '골치 아프다, 골치 아파.

집어치워라'하고 타박을 주기가 일쑤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에 대한 망각이나 기피는 결국 삶의 맹목을 의

미하며, 이 생명의 맹목감 속에서는 실상 진정한 가치관도 역사관도

설정될 수가 없다.

나는 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목숨의 길이를 모른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

나는 가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태평한 것에 스스로가 놀란다.

독일의 옛 민요인 이 노래는 우리 삶의 저러한 생각의 과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겠다.

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을 남긴 파스칼도 바로 그

《명상록》에서,

"인간은 명백히 생각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 품위요, 가치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무는 바르게 생각하

는 데 있다. 그런데 생각의 순서는 자신에서 비롯하여 자기의 창조

주와 자기의 목적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못박는다.

그런데 흔히들 자기 자신을 생각하라면 자신의 현실적 이해(利害)

만으로 여겨 '자기를 생각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

르지만 이 현실적 이해, 즉 소유만으로는 인간이 참된 삶이나 그 보

람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저러한 존재에 대한 본질적 물음들은 혼자서만의 생각이

나 체험으로 그 해답을 획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저러한 문제들에

대한 성현들의 가르침이나, 인문사상가나 문학자들의 탁월한 사색과

그 인식에 힘입어야 한다.

그런데 자칫하면 우리는 그러한 해답들에 그저 속절없이 의지만

하고 앵무새처럼 되뇌까리며 실제의 삶은 여전히 눈멀어 있기가 쉽

다.

가령 어떤 종교신자의 경우 그는 마치 생명보험이나 화재보험에

들듯 가입을 해서 보험료를 지불하듯 교무금이나 공양 등 외면적 치

레는 하면서도 그 교리와는 먼 생활을 한다면 그는 그 해답, 즉 진

리를 깨우친 것이 아니다.

진리란 영원하고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한 것이지만 자기의 실존적 삶, 즉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자신

이 깨우치지 않고선 체득할 수 없는 것이다.

새해 새 삶이 시작되는 마당에 삶의 참된 보람과 그 기쁨을 맛보

기 위해서는 각자가 존재론적 인식을 환기시키는 것이 우리의 제일

의적(第一義的)과제가 아닐까.

  • 구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