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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왜 절해유?

‘대한민국 헌법’을 읽고 나서

‘대한민국 헌법’을 읽고 나서

헌법 제정에 내가 직접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은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보호막이다. 내심 승인하는 이유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졌거나 태어나보니 이미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상낙원을 만들기 위한 성현의 경전에 비추어 현실은 여전히 미완성인 것처럼, 헌법 내용도 이 나라에 완전하게 적용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헌법은 정치적 대결의 산물이다.

하도 급하게 만들다보니 문장이 산만한 부분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금과옥조로 받들며 살아야 한다. 오랜만에 정독하며 나름 깨달음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헌법은 시대정신이 축적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한 것은 식민강권통치와 독재체제에 맞서 흘린 피와 눈물로써 헌법이 쓰인 것을 보여준다.

부당한 총칼 아래에서 굴복하지 않는 저항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현행 헌법에 명기된 대통령 직선제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쟁취한 것이다. 전두환의 호헌조치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의 불길을 댕겼다.

노태우의 6·29선언은 군부독재와 싸워 이긴 결과다. 그 힘으로 외환위기 사태를 극복했으며,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 한반도 평화를 논하고, 촛불혁명을 이뤘다.

그리고 총강 다음에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모든 헌법기관에 앞서 명시했다. 그 나라의 정치문화를 반영한 것인데, 미국은 입법부, 일본은 천황을 그 자리에 놓았다. 우리는 백성에 관한 조항을 맨 앞에 놓음으로써 헌법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한 것이다.

또한 나름대로 세계의 헌법 발전사를 수용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덕분에 수립된, 헌법이 갖춰야 할 본질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선거권과 권력분립을 통한 공화제, 천부인권인 백성의 기본권 등이다.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은 인류의 지혜로 확립한 보편적 가치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 헌법은 변화무쌍한 현실을 다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및 생태계 파괴와 같은 지구 위기 상황, 전염병의 대유행이나 인공지능 발전에 대한 대응, 한계에 처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 등 살활의 갈림길에 서 있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헌법 운용이 실질적이어야 한다. 기본권인 환경권은 권력자나 공무원들이 맘대로 휘두르는 난개발에 대한 주민참여에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 집회·결사의 자유 제한, 평등을 구현하는 차별금지법 법제화 거부는 누가 헌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왕적 행태의 대통령제가 보여주듯이 헌법도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를 수호하는 위정자들은 자신의 이익인가 국민의 이익인가, 강자나 다수에게 기울지 않고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정의와 평화를 향한 백성의 선한 의지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황당한 12·3계엄령은 지도자의 그러한 사유가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조선조 500년 역사의 요인은 무엇보다도 긴장된 윤리의식에 있다고 본다. 당리당략으로 과도했던 점도 있지만, 칼의 힘으로 통치해온 일본의 막부정권과는 차원이 다름을 보여준다.

영조는 신하들과 인심(人心)·도심(道心) 토론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신하들은 인심은 악하며, 도심은 선하다고 한다. 영조는 <서경>을 인용하며 “인심이 반드시 모두 악한 것은 아니니, 욕심에 흘렀을 때 악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위태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영조실록>)이라고 한다. 부도덕한 마음을 인심, 도덕적인 마음을 도심으로 보고 있지만, 영조는 그런 인심을 가진 이들을 어떻게든 교화해 도심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것이다.

백성을 품는 마음, 그것이 도심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국가 운영을 한다면 헌법은 비상하는 날개가 될 것이다. 절제와 중용의 도심 그 자체가 바로 헌법이 아닐까.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