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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김수환 추기경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1]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1]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식사 시간이 아까울 만큼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려

 

1963년 11월, 독일에서 7년만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한국 가톨릭은 정식 교계제도를 갖추고 자립기반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교회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길은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을 사목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구장님은 난데없이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직을 내게 맡기셨다. 신문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어 막막한 심정으로 출근한 신문사. 난 그곳에서 2년 동안 밥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에 미쳐 살았다. 돌이켜보건대 내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 때는 시보사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만 해도 가톨릭시보는 말이 신문이었지 신문이라고 내밀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모든 게 열악했다. 10명이 채 안 되는 기자와 직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리면서 근근이 신문을 내는 실정이었다. 독일 유학시절에 고국교회 소식이 궁금해 우편으로 배달되는 가톨릭시보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애독하기는 했지만 신문이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줄은 몰랐다. 구독료 수입이 적다 보니 기자들 봉급 챙겨주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여건에서 나름대로 전력투구하다시피하면서 신문을 만들었다. 신문이란 게 기획단계부터 최종 인쇄까지 일일이 손이 가고, 정성과 애정을 쏟아야만 제대로 나온다. 윤전기에서 막 나와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신문을 펼쳐들면 예술가가 고된 작업을 마치고 한발짝 물러서서 작품을 관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밤낮없이 정성을 쏟으면서 부지런히 일하니까 발행부수도 늘어 한결 재미가 붙었다.

 

하지만 수지타산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발행부수와 광고가 적어 적자를 면치 못하는데 그나마 있는 독자들도 구독료를 제때 납부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구독료를 그냥 떼먹겠다는 심보라기보다는 잊어버리고 안보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짬이 나면 가방을 들고 직접 성당으로 밀린 구독료를 받으러 나갔는데 어떤 성당 사무실에서는 잡상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저, 신부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신부님이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닙니다"

"그래도 좀 어떻게…."

"허허, 이 양반이 말귀를 못 알아 듣네."

 

내가 '독일물' 좀 먹었다고 독일식 사제복을 입고 다녔으니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당시 독일 신부들은 로만카라 대신 와이셔츠에 달린 것 같은 칼라가 붙은 흰옷에 셔츠를 받쳐 입었다.

 

그래도 편집국은 가족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직원들 봉급을 적정수준에 맞춰 주려고 노력했고, 특별히 생활이 힘든 직원에게는 남들 눈에 안 띄게 도움을 줬다. 부수와 광고가 늘어나니까 직원들 사기도 제법 올라갔다. 난 신문사에서 봉급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돈을 일절 갖다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1원이라고 더 보태서 재정을 튼튼하게 할까 궁리했다.

 

그때 제2차 바티칸공의회 바람이 한국교회에 불어오기 시작했다. 로마에서 열리고 있는 공의회 소식을 보도하는 일만큼은 사명감을 갖고 임했다. 한국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려면 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같은 건물에 동아통신사가 있어서 외신이 타전하는 공의회 뉴스를 시시각각 받아볼 수 있었다. 일반 통신사는 종교뉴스가 들어오면 거의 다 버리는데 난 동아통신사에 "바티칸 소식을 모두 넘겨 달라"고 부탁해 뉴스를 빠뜨리지 않고 꼼꼼이 챙겼다.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번역을 맡기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직접 번역을 해서라도 신문에 실었다.

 

난 가톨릭시보가 비록 종교매체이지만 비신자도 읽고 싶은 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설(社說)은 내가 거의 다 썼는데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도 심심찮게 다뤘다. 어느날 신문사에 드나드는 정보과 형사가 "가톨릭시보에서 이런 사회적 얘기도 쓰네요"하며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

 

변화와 쇄신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유명한 목사와 스님, 이어령씨 같은 명사에게 편지를 띄워 "가톨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루빨리 고쳐야 할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 그분들이 보내준 답장원고를 보니까 가톨릭을 사정없이 비판하는 글이 많았다.

 

심지어 '교회 밖 사람들이 가톨릭을 이토록 부정적으로 보는가?'하며 탄식한 적도 있다. 그 원고들을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신문에 게재했다. 원고의 일부분을 옮긴다.

 

"교황의 독점 성서해석의 권위는 재고해야 한다. 베드로는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가 아니라 '비두니아'에 흩어진 모든 성도들에게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다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고 성서해석의 권리가 있다.… 로마교회가 단순히 용어와 어휘상의 오해가 종교개혁을 가져왔다고 보고 이에 대한 재음미만 힘쓴다는 것은 종교개혁의 진의를 모르는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이영헌 기독공보 편집인, 1964년 8월2일자 게재)

 

장면 박사님 같은 분은 걱정이 되셨는지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려도 되느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주셨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지 않겠습니까"라는 요지의 답장을 보내 드렸다.

 

매스미디어는 복음선교사업에 있어서 더 없이 유용한 도구다. 교황 비오 10세(1835-1914)는 이미 100년 전에 "돈이 부족하다면 내 주교관과 목장을 팔아서라도 미디어를 통한 복음선교사업에 나서야 한다"라고 역설하셨다. 서울대교구장 재직시절에 평화방송·평화신문 설립을 최종 승인한 것도 이같은 확신과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교도사목에도 관여해 재소자들을 자주 만났다. 그때 만난 사형수 최월갑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평화신문, 제744호(2003년 10월 19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