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풍진 세상

청년이여, 행복을 보류하지 말자

청년이여, 행복을 보류하지 말자

2022년 12월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인간은 자연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는 자멸과 같다”라고 연설했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 그는 “공기와 물이 오염돼 해마다 900만 명이 사망한다” 하면서, 코로나19의 6배라고 덧붙였다. 현재 추세로 “사람과 가축이 야생동물의 서식지와 서식 공간을 빼앗으면 더 많은 바이러스와 질병이 동물에서 옮겨올 것”으로 예견한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젊은이에게 코로나19가 물러나면 “새로운 일상”을 열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가 원한 새로운 일상은 무엇일까?

탐욕스런 화석연료 과소비는 80억으로 늘어난 인간 사회에 코로나19를 불러들였다. 잘사는 국가들의 발 빠른 조치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건강한 사람에게 치명적이지 않게 물러날 모양인데, 화석연료 소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전기, 수소, 원자력으로 이름을 바꾼 에너지는 기후위기를 오히려 부추길 것이다. 미래세대의 생존을 한층 위협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감염병이 다시 창궐할까?

미래학자는 현재 잘나가는 직업 중 80퍼센트가 사라질 거라 예견한다. 스스로 판단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사람의 일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으로 예측한다. 자동차 조립은 물론이고 농업과 식당 서비스까지 로봇이 사람을 대신하는 세상인데, 전염병과 기후학자는 다른 예측을 내놓는다. 에너지와 기후위기로 해안 지대의 도시와 농토가 물에 잠기고 세계의 농산물 물류에 차질이 생기면 인류는 경험하지 못한 재앙에 휩싸일 수 있으므로 늦지 않게 대안적 삶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의 당부와 비슷하다.

기후학자는 마음이 급한데, 흥청거리는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멈칫거린다. 청년의 내일을 건강하게 안내해야 할 교육도 마찬가지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은 타성과 관성에 젖었다. 대학 입시에 매진하는 분위기를 버리지 못하는 학교는 사라질 직업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청년에게 대안을 제안하지 못한다. 대학이 직업학교는 아니지만, 졸업생이 전공에 맞는 직장을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니 코로나19로 2020년대를 우울하게 시작한 청소년들이여. 무기력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내일을 스스로 열자.

유엔 사무총장은 위기로 치닫는 기후변화의 실상을 마주하며 입이 바싹바싹 타는 모양이다. 2022년 11월 이집트에서 열린 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우리는 ‘기후 지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가속 페달까지 밟고 있다” 하며 열변을 토했다. “협력할지, 멸종할지” 선택해야 할 시점이라고 세계 각국에 경각심을 요구했는데,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주요국은 기후위기를 다급하게 여기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지만, 머지않아 바뀔 것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상이변을 번번이 무시할 수 없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화석연료 과소비로 잘살아 온 국가의 정상, 그리고 기업인을 향해 청년의 “미래를 빼앗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타오르는 지구의 불을 끄는 데 당장 행동하라!” 요구하는 청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기후위기 신호가 점점 분명해지는 스웨덴에서 행동한다. 툰베리의 행동은 스웨덴을 넘어 세계의 청년에게 전파되었고, 우리나라 역시 많은 청년단체가 탄생해 절박한 마음으로 행동한다. 위도가 높을수록 기후위기는 가깝고, 온실가스 배출을 전혀 줄이지 못하는 우리나라도 위태로운 건 마찬가지다. 뜨거운 행동으로 일제와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우리 청년의 행동과 목소리는 매우 소중하다.

모교 출신에 법조인이 유난히 많다고 자랑하는 어떤 정치인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촛불소녀’를 쓸모없는 ‘날라리’로 깎아내렸다. 그럴까? 2008년 광우병이 의심되던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기 위해 광화문에 모인 촛불소녀는 “야간자율학습과 0교시에 지쳐 잠 못 들다, 학교 급식으로 나온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려 먼저 죽으면 경부운하에 재를 뿌려 달라!” 외쳤다. 인격 연마 없는 법조인보다 건강한 목소리였다. 촛불소녀의 행동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광우병 환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환경단체는 ‘기후변화’보다 ‘기후위기’라 말한다. 시민사회에 경각심을 전하고 싶은 마음인데, 유럽인들은 ‘멸종저항’ 운동에 나선다. 기후위기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미래세대가 멸종의 길로 들어갈 게 명백하지 않은가! 그들은 정부와 기업에 저항하는 직접행동에 나섰고, 시민 목소리를 경청하는 유럽은 화석연료를 줄이려 나선다. 느긋한 우리나라보다 다급한 모습인데, 한 지역의 노력으로 효과가 나타날 수 없다. 경제성장의 달콤함에 취한 시민을 설득해 같이 행동할 솔선수범은 무엇일까?

지난 세기의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은 “경제성장이 계속될 것으로 믿는 자는 미치광이이거나 경제학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금은 21세기다. 불안하게 시작했더라도, 21세기는 행복한 22세기를 맞아야 한다. 코로나19를 초대한 경제성장 신화는 계속될 수 없다. 신화를 멈추게 하려면 청년의 행동이 필요하다. 2013년 프랑스 인권운동가 스테판 에셀은 96세로 숨을 거두기 전까지 청년에게 포기하지 말고 분노하고 행동하여 세상을 바꾸자고 말했다.

짓밟히던 여성 지위를 회복시키는 데 열정을 다했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시민운동의 소중한 덕목으로 ‘분노’를 꼽았다. 서슬 퍼렇던 일제와 군사독재가 이 땅에서 물러갔어도 분노하며 행동해야 할 일은 적지 않다. 경제성장이라는 감언이설을 앞세우며 탐욕을 거두지 않는 기득권에 대항하는 행동은 시민단체의 몫인가? 자신의 내일을 빼앗길지 모를 청년은 오늘도 대학입시에 넋 놓고 매달려야 할까?

“지속가능한 경제”는 틀렸다. 미래세대 생명을 위기로 몰아가는 경제성장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갈을 앞둔 석유로 얻는 행복은 천박하고 지속가능하지 않다. 최근 네덜란드 법정은 “탐욕스러운 경제성장이 이끈 기후위기의 파국은 정부가 책임지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고 판결했다. 어쩌면 돌이킬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내일을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누리려면 석유 없어도 행복한 삶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에서 기대할 게 없다. 기득권이 만든 세상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기대하는 새로운 일상은 열리지 않는다. 선진국 진입을 꿈꾸며 젊음을 허비한 어른은 위기에 몰린 미래세대를 위해 어떤 행동에 나서야 할까? 경제성장의 길을 요구할 수 없다. 행복은 경쟁의 승리에서 찾을 수 없다. 화석연료 과소비로 가능했던 경제성장은 생태 문명의 파국을 초래했다. 경제성장을 강요하는 근대 문명은 다양성을 이해하고 개성을 배려하던 생태 문명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대안이라기보다 우리 땅에서 지속가능하던 조상의 삶이다.

청년이 누려야 할 행복은 다양하다. 청년들이여! 누릴 행복이 보인다면 당장 행동하자. 막연한 내일의 행복하기 위해 오늘, 이 소중한 시간을 덧없이 보내지 말자. 나이와 학력에 관계없이, 이웃과 생태계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행복을 찾아 나서자. 이런 세상을 물려줘 후회스러운 어른은 행동하는 청년을 지원하면서 격려해야겠지.

박병상 60플러스 기후행동, 상임공동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