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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1요한2.22-28.요한1.19-28)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

종종 교우들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듣게 됩니다. 기분 좋은 내용도 참 많습니다. “새로 부임하신 주임 신부님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판박이입니다. 자상하고 편안하며, 늘 격려하고 칭찬하십니다.

강론도 교우들 눈높이에 맞춰 정성껏 준비하시니, 성당 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졌습니다. 쥐구멍에도 해뜰 날이 있다더니,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던 우리 본당에도 이런 신부님이 오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듣고 있는 제가 다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그런데 걱정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어디 가면 치유나 예언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이 계신다. 한번 같이 가보시겠느냐? 많은 환자들이 치유되고 은혜를 입는다.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조금 알아보니, 우리 교회가 가장 경계하고 우려해야 할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은밀히 홍보를 하고, 사람들을 끌어가고, 교묘히 뭔가를 요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거짓 목자, 거짓 예언자들은 마치 독버섯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잘못 빠져들어 갔다가는 독버섯 먹고 즉사하듯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니, 언제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 있었으니,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벌인 세례 동은 당시 범국민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다른 거짓 예언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시원시원 거침없었으며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웠습니다. 때로 그 칼끝이 부패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할 때면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뒤가 구린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아무리 뒷조사를 해봐도 티끌 한 점 구린 구석이 없었습니다. 청렴결백했고 그로 인해 당당했으며 부패한 권력자들 앞에서 꿇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혹시나 세례자 요한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세례를 통한 전 국민적인 정화 운동에 겁을 집어 먹은 유다 최고 의회는 세례자 요한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 세례자 요한을 취조합니다. 취조 과정에서 놀랄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조사관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요?”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데, 세례자 요한은 펄쩍 뛰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메시아가 아닐까, 의혹은 품는 것조차 송구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도 꺼내기 전에, 비교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며 서둘러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향한 종으로서의 충실함과 충직함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누구요?”라는 거듭된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게 자신의 신원을 밝힙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무나 겸손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의 위엄과 영광에 비하면 자신은 정녕 아무것도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나란 존재는 그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벌써 모든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좀 더 각광받고 구세사의 무대 위에 완전히 자리 잡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감춥니다.

선구자로서, 예언자로서, 종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 잘 수행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거칠지만 소박하고 꾸밈없고 거짓 없는 세례자 요한의 삶 앞에 갖은 겉꾸밈으로 요란한 우리들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 앞에 어떻게 해서든 한번 드러내 보이려고, 있어 보이려고 애를 쓰는 우리들의 가식적인 삶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