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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 열두 사도 뽑으시다 >

2023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히브8.6-13.마르3.13-19)

< 열두 사도 뽑으시다 >

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라고 부탁만 한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제 이름도 모르고, 저의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까지 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아주 간단한 것이라면 해 줄 수도 있겠지만,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것이라면 거절할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지금 너무 어렵습니다. 돈 좀 주세요.”라면서 제게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꽤 큰 금액이었기에 제게 그런 부탁을 한다면 저를 잘 아는 사람인가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저의 이름도 몰랐고, 새벽 묵상 글을 통해 저를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신부’라는 이유로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교구 사회복지회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잖아요.”라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돈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분과의 만남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께서는 얼마나 더 어이가 없으실까 싶더군요.

기도도 잘 하지 않고, 주님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자기 부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화를 내고, 하느님께서 안 계신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왜 자기 뜻이 이루어져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먼저 하느님을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뜻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 3,15 참조).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박해 속에서 고통과 시련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주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순교까지 하십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만의 사랑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사랑을 봐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는 것만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으로 갚아주십니다. 참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

시도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전전이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토마스 에디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