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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老年의 삶

잃어버린 기억의 자리에 주님의 은총을

  • 잃어버린 기억의 자리에 주님의 은총을

사무실 들어갈 때, 메일을 확인할 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주문할 때, 은행을 이용할 때, 집에 들어갈 때 등 일상생활 안에서 비밀번호 설정이 너무나 많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 정보 유출 방지를 위해 컴퓨터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알림이 오면 ‘연장하기’를 눌러 그 순간을 회피합니다.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비밀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아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번호를 누르며 시간을 허비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미지는 연상되는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의도치 않게 ‘스무고개’ 게임을 하며 대화를 이어 갈 때가 있습니다. “그거 있잖아요. 빨갛고 동그란 과일….” “빨갛고 동그란 거요? 사과? 앵두? 감? 토마토?” “맞아요! 토마토! 토마토란 단어가 왜 그렇게 떠오르지 않는지 답답하네요.”

영어나 프랑스어와 같은 타국의 언어도 아니고 일상에서 자주 쓰는 단어인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헤매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혹시 내가 치매가 걸린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한 생각이 앞선다고 합니다.

인지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거동이 불편하거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면 ‘치매’라고 하지만, ‘경도 인지장애’는 기억력이 많이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경도 인지장애는 치매 전 단계를 말합니다. 기억력이 나빠지거나 말이 어눌할 경우 가족 중에 누군가는 신경을 써서 신경과에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경도 인지장애가 치매와 다른 것은 생활하는 부분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치매(癡)라는 단어는 어리석을 치(癡), 어리석을 매()로 어감이 좋지 않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았을 때, 건강 관리와 약의 도움을 받으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예방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될 것만 같아서 약 처방을 받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치매 증상이 심해지면 약물로도 감당이 되지 않아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011년부터 국회에서 병명 개정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통과된 것은 없었으며, 보건복지부에서도 ‘치매’라는 말을 어떻게 대체 했으면 좋을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시행했지만 ‘치매’라는 병명을 바꾸는 것 자체도 찬반양론이 많았습니다. 대체 용어로 ‘인지 저하증’, ‘인지 흐림증’, ‘인지 장애증’, ‘기억 장애증’ 등이 제안되었지만 아직 별다른 결론을 내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뜻과 어감이 좋지 않아 용어를 바꾸어 쓰고 있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調絃炳)이라는 용어로 바꾸었고, 간질을 ‘뇌전증’(腦電症)으로 바꾸어 사용함으로써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던 것처럼 ‘치매’도 하나의 질병 중에 하나로 인식할 수 있도록 긍정도 부정도 아닌 적절한 용어로 대체 되었으면 합니다.

인지 기능 저하를 예방하는 방법으로 지적, 사회적, 신체적 활동을 많이 할수록 뇌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인지 기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지적하는 행위나 공격적인 태도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피해야 하며, 일상생활에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정서적 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잃어가는 기억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크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크고 작은 기억과 상처를 잊기 때문에 용서할 마음이 생기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잃어버림으로써 비워진 그 자리에 주님의 은총이 자리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비움의 자리’는 나로 가득 채웠던 자리에, 애초부터 나를 있게 하신 그분께 내어 드림으로써 완성되는 자리이기에 잃어버림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 가톨릭평화신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