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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慈悲는 고운 情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 “줄세우기만 바꿔도 세상이 바뀔것”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 “줄세우기만 바꿔도 세상이 바뀔것”

민들레국수집과 민들레공부방, 민들레희망센터 등이 있는 인천시 동구 화수동 골목길에 선 서영남 대표. 조현 종교전문기자

민들레국수집에서 그가 ‘브이아이피 손님’이라고 노숙인들을 챙기는 서영남 대표. 조현 종교전문기자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10차례에 걸쳐 진행해 더불어 사는 삶이 주는 맛을 나눕니다. 4번째는 인천 민들레국수집 서영남 대표입니다.

인천시 동구 화수동 화도진공원 인근 조그만 골목길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햇살 좋은 언덕에 민들레국수집이 있다. 노숙인을 비롯해 배고픈 사람들이 토·일·월·화·수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언제나 공짜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다. 청송교도소를 비롯해 전국의 교도소에 갇힌 형제들을 찾아가는 목·금요일을 빼곤 20년을 한결같이 ‘브이아이피(VIP) 손님’을 맞은 서영남 대표(69)를 17일 찾았다. 이곳에선 길고양이들까지 브이아이피 대접을 받아서일까. 민들레국수집 입구엔 길고양이들까지 식사를 끝내고 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민들레국수집에서는 10여명이 점심을 먹고 있다. 여기까지 찾아온 노숙인들에게는 이것이 하루의 유일한 끼니일 수 있다. 식판에 넘치도록 담은 밥과 반찬에서 이들의 허기가 느껴진다. 국숫집이라지만 국수는 없다. 20년 전 서영남 대표가 25년간 머문 수도원에서 나와 단돈 300만원으로 노숙인들을 먹이겠다고 나섰을 때만 해도 국수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여느 뷔페 음식 못지않다. 음식을 다 먹은 분들에게 서 대표는 더 드시라는 권유를 잊지 않는다.

무시당하고 차이다가도 이곳에 오면 ‘우리집 브이아이피’라고 불러주는 서 대표가 있어서 이들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모처럼 만의 식사를 즐긴다. 그렇게 다 먹고 나가려는 손님을 붙들고, 다시 따뜻한 떡을 안겨주고, 담배를 원하는 이에겐 살짝이 주머니에 담배를 넣어준다. 그의 주머니는 브이아이피 손님들을 위한 것들로 채워진 화수분인 것만 같다. 이렇게 매일 200여명이 서 대표와 봉사자의 사랑 속에서 삶의 허기를 채운다.

지난 4월1일 민들레국수집 20주년을 맞아 김영욱 신부, 최종수 신부 등의 집전으로 민들레국수집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사진 민들레국수집 제공

지난 4월1일 민들레국수집 20주년을 맞아 김영욱 신부, 최종수 신부 등의 집전으로 민들레국수집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사진 민들레국수집 제공

가톨릭수녀들이 민들레국수집에서 노숙인들에게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사진 민들레국수집 제공

“우리집 브이아이피 손님들은 너무 소박해요. 떡 하나만 줘도, 담배 한 개비만 줘도 그렇게 고마워할 수가 없어요.”

점심때가 되면 긴 줄이 설 때도 있다. 그러나 이곳의 밥 먹는 순위는 힘센 사람이 먼저도 아니고, 선착순도 아니다. 가장 오래 굶고, 가장 배가 고픈 사람을 먼저 먹게 한다. 줄 서는 것만 바꿔도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서 대표의 철학에 따른 것이다. 서 대표는 “먼저 음식을 받은 분은 양껏 드시지 않고 뒷분도 드셔야 한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경우가 많다”고 자랑한다.

사람들은 노숙인들을 비렁뱅이라고 멸시하지만,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안달하지, 이들은 조그마한 것에도 자족할 만큼 소박하기 그지없다는 게 그의 항변이다. 이것이 서 대표가 이들을 ‘하느님의 대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많이 가진 사람들의 욕심은 쉽게 채워지지 않지만 이들은 조그만 것에도 행복해하니 하느님이 보낸 사람들 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민들레국수집을 20년간 함께 해온 서영남 대표와 부인 베로니카, 딸 모니카. 사진 민들레국수집 제공

민들레공부방에 나오는 한 아이가 서영남 대표와 부인 베로니카, 딸 모니카를 그렸다. 사진 민들레국수집 제공

“노숙인들의 특징은 말이 없어요. 꿀 먹은 벙어리지요. 처음엔 ‘안녕하세요’란 말도 못하고, ‘고맙다’는 말도 못해요. 가난하고 소외되면 자기 존재감을 잊어버려요.”

처음 노숙에 나서면 천사인 양 나타나 대포통장을 만들어주고 대출을 챙겨 도망간 사기꾼으로 인해 빚쟁이까지 된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두번 세번 죽다 보면 누구도 믿지 못하고 말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노숙인들의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게 하는 곳이 같은 골목에 있는 민들레희망센터다. 민들레국수집에서 배를 채운 브이아아피손님들이 이곳에 와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서대표 부부가 3천원씩을 챙겨준다. 좀체 돈 구경할 일이 없는 이들이 처음엔 돈 욕심에 책을 보지만,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노트 한권을 채우면 서 대표는 ‘소원을 말해보라’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이 운동화를 사달라거나 양말을 달라는 소박한 소원을 말한다. 단 한 분만이 ‘너무 외롭다. 장가를 보내달라’고 해 그 소원만은 들어주지 못했다고 서 대표가 웃었다.

민들레다문화모임의 필리핀 이주여성들에게 서영남 대표와 베로니카 부부가 선물을 주고 있다. 사진 민들레국수집 제공

민들레다문화 모임의 아이들과 함께 한 서영남 대표와 베로니카 부부. 사진 민들레국수집 제공

민들레공부방에서 민들레다문화모임 아이들에게 서영남 대표와 베로니카 부부가 다과를 베풀고 있다. 사진 민들레국수집 제공

서대표는 1976년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들어가 25년을 머물던 수도원을 나와 2003년 민들레국수집을 시작했다. 그 무렵 베로니카·모니카 모녀를 만나 남편과 아버지로 한 가족을 이뤘다. 신혼여행을 청송교도소로 가 사형수들을 만나 위로하고 영치금을 넣어준 것으로 부부의 연을 시작할 만큼 브이아이피 대접에선 부창부수다.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해 번 돈으로 브이아이피 손님들에게 용돈과 옷과 양말을 챙겨주는 것도 베로니카의 몫이다. 그 어머니의 딸 답게 모니카는 이 골목 민들레공부방에서 달동네 아이들을 엄마처럼 돌봐준다. 이 가족의 사랑은 2014년부터는 필리핀의 빈민촌인 나보타스와 카비테, 두곳의 민들레국수집에서 기아선상에 고통받는 필리핀의 아이들에게까지 희망을 열어주고 있다.

필리핀 민들레국수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필리핀 빈민촌의 아이들. 사진 민들레국수 제공

필리핀 민들레국수집. 사진 민들레국수 제공

필리핀 민들레국수집에서 그림책을 보고있는 필리핀 빈민촌의 아이들. 사진 민들레국수 제공

이런 봉사가 정부의 지원이나 소수 부자들의 후원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서 대표는 지금까지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 △기부금을 얻기 위한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다 △생색내면서 주는 돈은 받지 않는다 △조직을 만들지 않는다는 4가지 원칙을 지켜왔다. 법인이 아니어서 이곳에 후원해도 세금 공제도 되지 않으니 생돈을 내야 하는데도 십시일반의 정성들과 봉사자들의 도움이 모이고 모였다. 민들레 언덕에선 매일매일이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서 대표는 또 하나의 꿈을 꾼다.

그는 노숙인들이 여행 가듯 3~4일쯤 머물고 갈 환대의집을 만들 꿈에 부풀어있다. 특히 그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십년째 매주 이틀씩 찾아다니는 교도소의 형제들이 출소 후 단 며칠만이라도 세상의 환대를 받을 곳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