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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慈悲는 고운 情

증오와 사랑의 힘, 어느 것이 강한가

증오와 사랑의 힘, 어느 것이 강한가

 

픽사베이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유성처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가는 청춘이란다.” 내 초등학교 시절 크게 인기를 끌었던 ‘빨간 마후라’라는 영화 주제가 한 구절입니다. 공군 전투비행사 주인공이 끝에 가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동안 동무들과 빨간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전쟁놀이를 했더랬지요. 어린 마음에도 ‘유성처럼 흐른다’는 가사가 참 멋져 보였고 이제는 ‘번개처럼 지나가는 청춘’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때 북한 괴뢰군이 얼마나 밉던지요. 여자 아이들은 ‘무찌르자, 공산당 몇천만이냐’ 노래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했지요.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부르기엔 끔찍한 노래입니다. 북녘 동포들이 몇천만이건 다 무찌르겠다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20년 전 평양 장충성당에 미사 드리러 갔을 때 호텔 방 티브이에서 만화영화를 보았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착한 다람쥐로 남쪽과 미국은 늑대로 그려지더군요. 북의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남쪽을 원수 삼게 되는 거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요. 중세 때 영국 수도사 둔스 스코투스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것이 선한 것은 오로지 신이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도 같은 견해였지요. 그렇다면 당신께서 이웃을 원수 삼기를 원하시면 그것이 선이 된다는 건가. 하느님을 최고로 받들고 싶어 나온 표현이겠지만 하느님과 선 그 자체를 별개로 전제하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건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신이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에 선한 것이라는 주장은 자칫 자신의 이익이나 주장을 신이 원하는 바로 포장하여 남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신이 원한다면서 같은 하느님을 믿는 이슬람을 향해 벌인 기독교도들의 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10만명 이상을 불에 태운 교회의 마녀사냥이 그랬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크라이나 전쟁도 러시아와 서방이 서로 자신들의 이익이나 주장을 ‘정당성’으로 포장하여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폭탄을 던지고 있습니다.

작년 7월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가 헌법에 부합되는지를 두고 공개 변론을 열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자신의 친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온 평범한 가정 출신인데 부모가 형을 편애한다고 생각해오다가 어느 날 부모를 죽이라는 환청에 이끌려 끔찍한 일을 벌인 겁니다. 나는 사형제가 위헌임을 확인받으려고 이 살인 사건을 맡으러 구치소에 찾아갔는데 변호사인 나도 무섭더라고요. ‘이런 친구를 사형에 처하는 게 잘못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저 무서운 친구가 아무리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는 겁니다. 이건 예수님 말씀이 헌법에 씌어 있는 겁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고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장 43~45절)

“존재, 있음, 없지 않고 있음.” 이것을 두고 동서고금의 여러 스승들이 주신 가르침은 표현 방법은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랐지만 근본은 똑같습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를 넘어선 당신으로부터 이 무수한 있음, 개체, 존재들이 떨어져 나온 순간부터 이 존재들은 불완전합니다. ‘유한성’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고, 어리석으며, 자기중심적입니다. 존재의 숙명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만이 존엄하다면 이 세상에 존엄한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모든’ 존재들을 존엄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형제 공개 변론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헌법 제10조에서 모든 사람이 존엄하다고 선언했는데 부모를 죽인 저 끔찍한 살인범은 헌법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에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그러니 재판관들의 개인적 소신이 어떠하든지 헌법에 답은 이미 정해져 있노라고,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사형제는 명백히 헌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재판관들에게 호소가 아닌, 선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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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저 남쪽 끝 보성 앞바다에서 젊은 남녀 4명을 죽인 70대 노인 살인 사건에서도 사형제가 심판대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나는 저 노인이 헌법에 존엄하다고 씌어 있는데 어쩔 거냐고 열심히 변론했지만 헌법재판소는 5 대 4로 사형제가 합헌이라 결정했지요.

나는 이번 재판에서 노르웨이 국민들이 총기 난사 사건에 대처한 예를 들며 변론을 마쳤습니다. 2011년 7월 노르웨이 한 조그만 섬에서 노동당 청소년 여름 캠프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극우 나치주의자 한 사람이 중화기로 무장한 채 나타나 섬 구석구석을 쫓아다니며 69명의 아이들을 사살했습니다. 섬에 들어오기 전 범행까지 합치면 모두 77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경악하고 모두가 살인범을 증오했지요. 그런데 노르웨이 총리는 추모식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지만 우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 단순한 맞대응은 절대 답이 아닙니다.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증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봅시다.”

이 극악무도한 테러범에 대해 법원은 징역 21년을 선고했습니다. 법정최고형이 사형이 아니라 징역 21년이었던 거죠. 그는 복역하면서 국립 오슬로대학교 정치학 과정 강의를 들었고 낡은 게임기를 교체해 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여졌답니다.

우리네 정서나 인과응보 감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을 노르웨이 사람들이 행하는 걸 보며 충격을 받았고 뒤이어 감동과 부러움이 일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충실하게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여러 차례 사형제 폐지를 언급하셨고 가톨릭 교리서 제2267조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에 비추어 ‘사형은 개인의 불가침과 인간 존엄에 대한 모욕이기에 용납될 수 없다’고 가르치며 단호히 전세계의 사형제도 폐지를 위하여 노력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존재’들은 너나없이 다들 유한하고 어리석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도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선인이건 악인이건 의로운 이건 불의한 이건 다 한 형제로 존중하라 하십니다. 당신께선 참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명하시네요.

글 김형태 변호사(공동선 발행인)

***이 시리즈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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