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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 쉬니 感謝

입 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 (어른을 위한 동화)

입 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 (어른을 위한 동화)

 

지은이: 정채봉

출판사: 샘터

머리글을 대신하여

입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

동백꽃을 흔히들 순정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더러는 겨울에 피기 때문에 남에게 들키기 싫고 혼자 간직하는 사랑의 표현을 동백꽃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혹시 색깔 없는 해말간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유리같이 찬 동백꽃을요. 나는 딱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동백나무에서가 아니라 소녀의 입 속에서 나온 동백꽃이었다고 말하면 더욱 놀라시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내 나이 열 살하고 한 살이었을 때 겨울비가 자주 내리는 저 남녘의 광양 읍내에서 있었던 일이지요.

우리는 그때 셋방살이를 했었는데 금융조합이 있는 골목 안집의 아래채가 비었다고 해서 보리 파종 때인 늦가을에 이사를 했었지요. 그런데 그 집에는 우리 보다 먼저 세들어 온 하동 할머니네도 살고 있었어요.

하동 할머니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송자라는 손녀딸 하나만을 데리고 우물에서 멀지 않은 건넌방에서 살았는데 밖으로 나오는 소리라고는 할머니의 푸념밖에 없는 이상한 가족이었습니다.

내가 송자 누누한테 말을 붙여 본 것은 우물에 두레박을 빠뜨리고서였습니다. 길다란 대가지에 삼발이를 달아매서 우물 속으로 들이밀었을 때 송자 누나가 그림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서 거울빛으로 우물을 비춰 주었습니다.

“누나, 고마워.”

“...”

“누나, 주전자도 하나 빠져 있다. 그지?”

“...”

“누나는 왜 말을 안해?”

그러자 송자 누나는 눈썹조차도 꿈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두레박을 건지자 거울을 들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서는 아무리 불러도 내다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점심 밥상 앞에서 나는 고모한테서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폐병으로 죽고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탄다지 아마, 말을 알아듣기는 해. 안할 뿐이지. 어떤 사건이 있어서 말을 잃어버린 모양인데 학교도 안 다니고, 정말 딱한 애야.”

겨울이 오면서 송자 누나의 방에서는 간혹 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밖에 나온 송자 누나를 볼 때가 있었는데 마른 갈대처럼 여윈 모습니었지요. 눈도 어찌나 깊어지고 있는지 먼 터널을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송자 누나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그날 송자 누나는 해바라기를 하려고 밖으로 나온 것 같았습니다. 양지쪽의 토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줄지어 가고 있는 개미들을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하동에서 다니러 온 우리 외사촌형이 대문을 들어서다 말고 송자 누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외사촌형을 졸라서 초등학교 시절 한 반이었다는 송자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요.

“담임선생님은 아마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쳐주시려고 그랬던가 봐. 가장 아끼고 싶은 말, 한 번만 하고 영원히 숨겨 두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어. 그런데 송자가 손을 든 거야.”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해 보라고 했다.

송자는 뜻밖에도 북쪽 창가 영석이한테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리고는 영석이 귀에 입을 대고 뭐라고 귓속말을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얼굴이 빨개져 있는 영석이를 다그쳤다.

“송자가 뭐라고 했니?”

“저어...”

“선생님은 다 알고 있어. 뭐라 했냐니까?”

“사... 사...”

“바로 말해 봐. 뭐라고 했어?”

“사... 랑... 해... 라고...”

아이들이 책상을 치며 발을 구르며 `와`하고 소리친 것과 선생님이 송자한테로 달려가서 들고 있던 대나무자로 입을 때린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 시간부터였다고 했습니다. 송자 누나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 것은. 뒤늦게 선생님이 달래어도 윽박질러도 봤지만 한 번 잠가 버린 송자 누나의 입은 영열리지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튿날부터 나는 말이삭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송자 누나를 더욱 열심히 살폈습니다. 그러나 송자 누나는 내 기대와는 반대로 점점 보기조차 어려워져 갔습니다. 대신 기침이 잦아졌고요. 어쩌다 송자 누나의 방 유리창에 낮달처럼 떠 있는 얼굴을 보는 일만이 이어져 갔습니다.

엄동 추위가 몰아친 이른 아침이었지요. 나는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다 말고 송자 누나의 방 유리창에서 아주 신기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성에 무늬가 만들어 놓은 높은 성과 숲과 초가집이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저것은 송자 누나의 입에서 말 대신에 나온 송자 누나의 속세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후 나는 아침이면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송자 누나의 방 유리창에 어려있는 성에로 송자 누나의 속세상을 어림짐작해 보곤 하였지요. 때로는 파도 위의 섬을, 때로는 높은 산 낮은 산이 연이어 있는 산맥을, 그리고 물레방앗간이 있는 언덕 위의 정경을...

그런데 그날 아침은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통곡 소리가 있었습니다. 송자 누나의 할머니 울음 소리였지요. “아이고 송자야 눈 좀 떠라! 아이고 송자야 눈 좀 떠아라!”

어른들은 모두 송자 누나네 마루에서 기웃거리는데 나는 유리창이 잘 보이는 장독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유리창에 어려 있는 성에꽃을. 그것은 틀림없는 동백꽃 세 송이었습니다. 아아, 나는 송자 누나가 `사랑해라고 했던 세 마디의 말이 꽃이 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틀 후, 송자 누나는 들고개 화장장에서 한줌 재로 몸을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송자 누나는 서산 밑으로 흐르는 냇물에 할머니에 의해 후여후여 뿌려졌지

요.

다음날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나는 서천의 갈대밭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한 고등학생을 보았습니다만 그가 영석이 형인 줄은 물어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서천 기슭에 동백꽃이 몇 송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송자 누나가 입으로 내보내고 가슴속에 남은 사랑의 꽃송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송자 누나처럼 사랑의 말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분들께 이책을 올립니다. 한 가지 더, 이 책은 (돌, 구름, 솔, 바람)의 제목을 바꾼 것임도 밝히고자 합니다.

`97년 10월 정 채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