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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길동무 얘기

‘광주의 5월’ 기억하는 건 ‘희망의 5월’을 위해서입니다

  • ‘광주의 5월’ 기억하는 건 ‘희망의 5월’을 위해서입니다

조영대 신부

5월은 누군가에게는 기다려지는 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달이기도 하다. 하지만 계절은 돌고 돌아 어김없이 봄은 찾아오고, 또다시 5월을 마주한다. 좋은 기억이든 아니든,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진다지만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져 간다.

올해는 5·18 민주화운동 43주년이 되는 해다. 5·18 기념일을 앞두고 그날에 대한 ‘기억과 희망’을 들어봤다. ‘조비오 신부’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고 조철현(비오, 1938~2016) 몬시뇰의 조카인 조영대(광주대교구 하남동본당 주임 겸 예수의 소화수녀회 지도) 신부를 2일 광주에서 만났다.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

오늘도 총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닫힌 방 안에서도 총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무슨 일일까, 누가 총에 맞진 않았을까. 걱정이 앞섰다. 할머니의 감시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거리 풍경은 끔찍했다. 최루탄으로 거리는 연기가 자욱했고, 총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전남대학교 인근 하천까지 내려갔을까. 당시 18살이던 조영대 신부는 눈을 의심했다. 총을 든 군인들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젊은이들을 두드려 패는 모습을 봤고 군인들에게 맞던 사람들이 도망가다가 하천으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봤죠.

너무 무서웠고 제가 몸이 얼어서 그 자리에 서 있으니까 인근에 있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저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빨리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휩쓸리거나 공격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요.” 실제로 조 신부가 다니던 성당의 1년 선배는 시위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1980년 5월 광주는 조 신부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고 조철현 비오 몬시뇰

1989년 2월 국회에서 열린 5·18 청문회에서 조비오(왼쪽 두 번째) 신부. 예수의 소화수녀회 제공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조 신부의 마음속에는 항상 조비오 신부가 있다. 5월의 사제라 불리는 조비오 신부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천주교를 대표해 시민수습위원회로 활동했다. 1980년 5월 26일에는 민주인사들과 함께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무력진압을 막아내기 위해 ‘죽음의 행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비오 신부님은 ‘우리가 총기를 가지고 있으면 군부에 빌미를 주는 것이고, 얼마나 더 학살할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평화 시위를 해야 하며, 그것이 광주 시민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조비오 신부는 그러던 중 내란방조 혐의 등으로 6월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비오 신부는 출소한 뒤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렸고, 초대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1989년 2월 국회에서 열린 5·18 청문회에서는 “신부인 나조차도 손에 총이 있었으면 쏘고 싶었다”며 계엄군이 저지른 만행, 헬기 기총소사에 대해 생생히 증언했다. “1980년 5월 21일 호남동성당에서 신부님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었을 때 그때 헬기 사격을 보셨어요. 조비오 신부님도 사병으로 카투사에서 근무하셨는데 ‘어떻게 자국민을 향해 헬기가 사격할 수 있는가,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굉장히 분노하셨다고 해요. 나중에 청문회 때도 증언을 하셨죠.”

조 신부는 “조비오 신부님이 그날 호남동성당에서 분명히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하셨다”며 “당시 호남동성당을 지키던 사목회 임원이 함께 그 상황을 목격해 법정에서 증언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전두환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전씨는 그렇게 상처가 난 곳에 또 상처를 냈다.

그래도 희망을 품다

조영대 신부는 2017년 4월 전두환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전씨는 2021년 11월 23일 사망했다. 40년이 넘는 시간이었지만, 전씨는 잘못에 대한 인정은커녕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조 신부는 허탈하고 한스러웠다. “제발 사죄하고 역사적 진실규명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건만 그렇게 사악한 삶을 살아오다가 사망하는 모습, 규탄과 비난을 받는 그런 죽음을 맞이했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올해 3월 말 전씨의 손자 전우원씨가 광주를 찾아 5·18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할아버지의 죄를 가족으로서 인정하고 회개하고 반성하며 살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로 비석을 닦기도 했다. 조 신부는 이런 전우원씨의 모습을 보며 “광주가 갖고 있는 한의 크기와 맞바꿀 만큼은 아니지만, 손자만이라도 진실을 위해 사죄를 한 것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조 신부는 “전우원씨가 정말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5·18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야 한다”며 “5.18의 진상규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할 때 그의 진정성은 광주 시민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조 신부는 “전우원씨가 저를 찾아온다면 기꺼이 만나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겠다”며 “그와 함께 조비오 신부님의 묘소에 가 신부님의 명예가 훼손된 것에 대해 사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우원씨가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광주가 도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가야 할 길

“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앞으로는 젊은 세대가 5·18을 더 기억해야 하겠죠.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민중이 흘린 피를 통해 이뤄졌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조 신부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에서만 교육이 이뤄질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시민의식과 가치관, 역사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왜 5.18을 이야기해야 하고, 5.18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은 건강한 사고에 있다는 설명이다. 조 신 부는 그러면서 “5·18의 바탕에는 불의에 맞서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내자는 대동정신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예수의 소화수녀회 수녀원 건립 난항

조 신부는 할 일이 많다.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조비오 신부가 고 김준오(레오) 형제와 공동창설한 예수의 소화수녀회를 돌보는 일이다. 현재 조 신부는 교구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의 대표이사로서 수녀원을 건립 중인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비용도 문제이거니와 시공사와의 마찰로 인해 지난해 2월 끝났어야 할 공사는 70%만 이뤄진 채 1년 3개월째 중단된 상태다. 수도자 17명 중 절반 이상이 60대가 넘고 70~80대 수도자도 있어서 수녀원 건립이 시급하지만, 진척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조비오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그런 말씀을 하시대요. 저한테 ‘영대야 네가 내 후계자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말씀이세요?’ 했더니 ‘수도회와 소화자매원 잘 돌봐라. 그리고 할 일이 많을 거다. 내가 정말 할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더는 말씀을 안 하셨어요. 아마 마지막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셨나 봐요.” 조 신부는 “조비오 신부님의 뜻을 그저 받들 뿐”이라고 말했다.

5월은 성모 성월이자 제일 좋은 시절이라고 노래하지만, 광주의 5월은 어느 때보다 아픈 달이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광주의 5월이 누구에게나 좋은 달로 기억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