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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왜 절해유?

부처님오신날은 왜 ‘부처님오신날’인가?

부처님오신날은 왜 ‘부처님오신날’인가?

기자명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부처님오신날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

부처님오신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인류 최고의 스승 부처님의 탄생일이자 불교 최대의 명절이다. 내 안에 있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워서 세상과 향유하는 날이다. 불교계가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날이기도 하다.

5월20일 저녁에 거행된 부처님오신날 봉축 연등회 연등행렬

#부처님오신날은 왜 '부처님오신날'인가?

‘부처님오신날’인 까닭은 말 그대로 부처님이 이날 오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생일은 음력으로 4월8일이고 그래서 ‘사월초파일’이라고도 하고 올해는 양력으로 5월27일이다. 처음부터 ‘부처님오신날’은 아니었다. 과거엔 공식적으로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고 했다(대통령령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부처님을 뜻하는 고유명사 가운데 하나인 ‘석가모니’에서 유래했다.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인데, 결국 ‘석가’는 부처님이 속한 부족의 명칭이지 부처님 당신이 아니다. 오류이자 모독인 셈이다. 불교계의 부단한 청원으로 마침내 정부는 부처님오신날이라고 바로잡았다. 2018년부터 부처님은 여법(如法)하게 오실 수 있게 됐다.

처음부터 국가공휴일이었던 것도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25일에 국가공휴일로 지정됐다. 당시만 해도 불자 인구가 크리스천보다 훨씬 많았지만 대통령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면서 불자들에게도 든든한 구심점이 생겼다. 1963년 4월 조계종 총무원은 ‘부처님 탄일 공휴일 제정’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지속적인 탄원과 법정투쟁 끝에 비로소 쟁취했다. 1975년 1월14일 국무회의에서 국가공휴일로 의결됐다. 불자들의 단결된 힘이 만들어낸 부처님오신날이고 ‘빨간 날’이다.

#부처님오신날은 정말 부처님오신날일까?

부처님오신날은 나라와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등 동아시아권에서는 공통적으로 음력 4월8일이 기념일이다. 일본만 예외로 ‘양력’ 4월8일이다. 반면 동남아시아의 불교국가들은 음력 4월15일에 부처님오신날을 쇤다. 이름하여 '웨삭 데이(Vesak Day).' ‘웨삭’ 또는 ‘베삭’은 부처님이 사용하던 언어인 빨리어 ‘위사카’에서 왔는데 인도 달력으로 2월을 가리킨다.

국제적으로는 음력 4월15일이 부처님오신날이다. 유엔(UN)은 1999년에 ‘웨삭(베삭) 데이’를 부처님오신날로 정했다. 이후 매년 이날마다 부처님 탄생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발표한다. 한편 1955년 네팔에서 열린 제4차 불교도대회에서는 양력 5월15일을 부처님오신날로 하기로 했었다. 한 술 더 떠 1998년 스리랑카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양력 5월 중 보름달이 뜨는 날’로 바뀌어 한결 모호해졌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 역시 초기에는 ‘12월25일’ ‘1월3일’ ‘3월21일’ 등으로 중구난방이었다. 동방정교회는 여전히 1월6일부터 7일까지가 성탄절이다. 거의 2600년 전의 일이고 부처님의 탄생일을 확증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4월8일을 단순한 날짜가 아니라 상징적인 '코드'로 해석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음력 2월8일에 출가해 12월8일에 깨달음을 얻었다. 4성제와 8정도와 12연기의 가르침을 전했고 8만4천 법문을 설한 뒤 열반에 들었다. 남겨진 사리(舍利)의 개수는 ‘8섬 4말.’ 고대부터 완벽한 숫자로 여겨지는 4의 배수로 점철된 생애였다.

 

#부처님은 왜 부처님인가?

부처라는 낱말의 시원은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다. ‘깨달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보다 불교를 앞서 받아들인 중국에서는 붓다를 ‘불타(佛陀)’라고 번역했고 ‘부텨’라고 발음했다. <보현십원가>는 10세기 고려의 스님이었던 균여대사가 지은 향가다. 여기서 부처는 ‘佛體(불체)’라는 한자로 기록됐다. ‘부처님의 몸’ 또는 ‘부처님이라는 인격체’ 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읽을 때는 ‘부톄’라고 읽었는데 역시 붓다의 변형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부처님은 ‘부텨님’이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조가 주도해 편찬한 <불전언해>가 근거다.

‘佛(불)’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심오한 글자다. ‘사람 인(人)’ 변에 ‘弗(아니 불)’이 들붙은 구조로, 곧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물론 비(非)인간이 아니라 초(超)인간으로 읽어야 옳다.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한계를 완벽하게 극복한 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외에도 부처님을 가리키고 기리는 별칭은 대단히 많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세존(世尊).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의미다. 진리의 세계에서 왔다는 여래(如來)는 사상적 측면에서 바라본 부처님이다.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세계의 실상과 원리에 그대로 일치한다는 예경의 호칭이다.

이밖에도 충분히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응공(應供),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정변지(正遍知), 계(戒) 정(定) 혜(慧)를 두루 완비하고 있다는 명행족(明行足), 깨달음의 피안(彼岸)에 이르렀으므로 다시는 삶과 죽음의 윤회에 빠지지 않는다는 선서(善逝), 세상만사의 이치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세간해(世間解), 부처님보다 뛰어난 인간은 없다는 찬사인 무상사(無上士), 거대한 지혜와 자비로 중생의 인생을 세세하게 교정할 수 있다는 조어장부(調御丈夫), 하늘나라와 인간세상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인 천인사(天人師)가 있다.

 

#부처님오신날엔 왜 연등을 다나?

5세기에 편찬된 경전 <현우경(賢愚經)>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난타(難陀)’라는 이름의 거지 여인이 있었다. 부처님을 받들며 등불을 공양하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없었다. 하루 종일 구걸하며 얻은 동전 한 닢으로 등잔과 기름을 조금 살 수 있었다. 비할 바 없이 값싸고 초라한 등불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의 등불은 하나 둘 꺼져 가는데 오직 그녀의 등불만은 건재했다. 부처님 앞에서 갑자기 거룩한 등불로 타올랐다.

부처님은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모두 끌어와 붓거나 크나큰 태풍을 몰아온다 하여도 그 등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등불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감동시킨 난타는 비구니 스님이 되었다. 이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일화에서 보듯, 부처님이 생존하던 시간에 등(燈)과 관련한 의식이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처님오신날은 불자들에게 축제다. 축제의 압권은 밤이고 불 밝힌 밤은 황홀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축제의 흥을 돋우기 위해 등을 밝히고 불자들은 연등을 밝힌다.

 

1976년 여의도광장 봉축점등식

#언제부터 달았나?

우리나라에서 연등을 켠 지는 공식적으로 1300년을 헤아린다.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함께 어울려 연등을 밝히는 연등회(燃燈會)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됐다. 동시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소실됐으나 9층 목탑으로 유명한 경주 황룡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였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다가 “신라 경문왕 6년(866) 정월 보름과 진성여왕 4년(890) 정월 보름에 임금이 경주 황룡사로 행차해 연등을 간등(看燈)했다”고 적었다. 누군가가 밖에 내걸었으니까 등을 ‘볼[看]’ 수 있는 것이겠다.

연등회가 지금처럼 부처님의 탄생일이라 여겨지는 음력 4월8일 즈음이 아니라 정월대보름인 1월15일에 열렸다고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7세기부터 열리던 중국의 상원(上元) 연등회 전통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초반까지 정월대보름에 열렸던 상원연등회는 고려 제8대 임금 현종 이후에는 2월 보름에 열렸다. 오늘날과 같은 음력 4월8일 행사는 무신정권을 거치면서 정착됐다. 상원연등회는 국가가 주도하는 ‘국민총화’의 성격이 짙었다. 이와 달리 사월초파일 연등회는 부처님오신날 일반 백성들이 만들어가는 놀이한마당이었다.

불교가 서러웠던 조선시대에도, 민족 전체가 서러웠던 일제강점기에도 연등회는 꾸준히 유지됐다. “파일빔을 곱게 입고 관등 차로 나선 도련님, 아가씨로 거리가 꽃밭을 이루게 되어 이날이야말로 조선에 있어서는 국민적 놀잇날이다(매일신보 1929년 5월16일자.)”

 

#연등회는 부처님오신날에 열리지 않는다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국가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연등회도 크게 확대됐다. 공휴일 제정 이듬해인 1976년부터 불자들은 여의도광장에서 종로 조계사까지 무려 9km의 차도를 당당히 활보할 수 있게 됐다.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는 1976년 5월9일자 신문에서 “10만 불자들이 참가해 갖가지 장엄물을 앞세우고 제등핼렬을 벌였다”고 적었다.

하지만 도보로 움직이기엔 그 거리가 너무 길어서 조계사에 도착할 즈음이면 전부 녹초가 되었다. 1996년 출발장소를 동대문운동장으로 변경했다.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고서는 2013년부터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 운동장에서 걷기 시작한다. 동대문-탑골공원-종각-조계사까지 걷는다. 5만 명 이상이 걷고 10만 개 이상의 연등이 넘실거린다.

연등회는 부처님오신날에 열리지 않는다. 직전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린다. 불교 최대의 명절을 봉축하는 분위기를 최고조로 돋우기 위해서다. 전야제나 리허설과 같다. 부처님오신날 당일에는 전국 방방곡곡 사찰에서 봉축법요식(奉祝法要式)이 거행된다. ‘법요’란 불법(佛法)의 요체라는 의미다.

법요식을 통해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현자가 가르친 지혜와 자비를 익히고 베풀면서 참된 불자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법회다. 화려하고 흥겨운 연등회와는 달리 법요식은 매우 정적이고 엄숙하다. 부처님오신날 이후에도 절에서는 음력 5월 초하루까지 한 달 가량 계속 연등을 걸어둔다. 행인들은 으레 낮에는 연등이 드리운 그늘 아래서 쉬고 밤에는 사진을 찍는다. 크고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는 아래서는, 모두가 아름답다.

매년 부처님오신날 조계사에서 열리는 봉축법요식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