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은총을 찾아서>
사탕 한 알의 사랑
김영진 신부 | 제천 남천동 본당 주임
내가 주임으로 있는 남천동 성당은 설립된 지 65년이나 되는 오래된 성당이다.
역사가 깊은 만큼 신앙도 깊은 곳이다. 그런데 산업화의 영향과 주거 환경의 변화로 젊은이들이 드문 성당이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떠났고, 외곽 지역 아파트 단지들이 생겨나면서 그나마 아파트 단지로 젊은 부부들이 떠나고 나니 연세가 높으신 어른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날엔가 평일 미사에 80여 명이 참석하셨는데 나보다 나이 적은 분을 찾으니 한 사람도 없었다. 내 나이도 50대 중반이니 웬만한 도시 본당에 가면 특히 아파트가 듬성듬성 있는 곳엘 가면 중간 정도는 될 텐데, 하며 궁리를 해낸 것이 나이 줄이기였다.
65세 이상 되신 분들은 무조건 나이를 스무 살씩 줄이시라고 했더니 70세 되신 분들이 50이라 하면서 싱글벙글하셨고 80세 되신 분은 ‘예순 살밖에 안 됐어요’ 하며 좋아들 하셨다. 어느 날 65세 되신 자매님이 내 나이 마흔다섯밖에 안 됐으니 신부님하고 연애 한번 해야겠다고 농담도 하셨다.
나이라는 것이 숫자가 높아지면 마음도 늙어지고 숫자가 낮아지면 마음도 젊어지는 것 같았다. 어째든 나이를 스무 살씩 줄이라고 한 것은 잘한 것 같다. 어느 날 마리아 할머니님이 내게 사탕을 하나 주면서 “신부님, 건강하세요. 나는 일흔여섯밖에 안 되었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 성당 오기가 힘들어요” 하시며 밝게 웃으셨다.
마리아 할머니의 실제 나이는 96세이신데 주일 미사는 거르지 않으신다. 마리아 할머니는 불행하게도 아들, 며느리가 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멀리 있는 손자들이 가끔 내려와 보고 있고 외딴 논 한가운데 지어진 비둘기 집 같은 곳에 홀로 사신다. 손자가 있다 하여 정부 보조도 한 푼 없고 가난하기 이를 데 없이 사신다.
이렇듯 처지가 몹시 딱한 분이시지만 미사에 오실 때마다 여름에는 모시 적삼 주머니에, 추울 때는 스웨터 주머니에 사탕을 몇 개 넣어가지고 오셔서 미사 후에는 꼭 신부, 수녀 손에만 쥐어 주신다. 애기처럼 웃으시며 ‘신부님 건강하세요’라고 하실 때마다 나이 어린 내가 할머니께 드려야 될 인사를 오히려 할머니께서 먼저 늘 하시는구나 하는 죄송스러움으로 나도 ‘할머니 건강하세요’ 하며 두 손을 잡아 드린다.
나는 마리아 할머니 주머니 속에 있는 사탕의 색깔과 무게를 안다. 연세는 96세라지만 소녀 같은 색깔을 갖고 계시는 할머니, 허리는 굽어졌고 키도 작아져 한 움큼밖에 안 되리만치 노쇠해지셨지만 성모님의 고통과 사랑의 무게를 지고 계시는 할머니, 힘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걸이이시지만 우리 공동체를 떠받치고 계시는 신앙의 기둥이신 할머니.
주일이 되면 한 알의 사탕이 그리워지는 것은 마리아 할머니의 맑음과 사랑의 향기를, 고통과 인내의 숨결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져도 가져도 목말라 하는 이들, 채워도 채워도 배고파하는 이들, 그래서 더 갖고자, 더 누리고자, 더 채우고자 발버둥침에 혼탁하여진 세상을 살면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산골짝 논 가운데 달랑 남은 비둘기 집 같은 곳에 사시는 맑은 수정과 같은 마리아 할머니의 주머니 속 사탕 한 알의 사랑을 내 영혼의 스승으로 삼고 싶어 한다.
얼마를 더 가지면 나누어 줄 수 있을까?
얼마를 더 살면 사랑이 새어 나올까?
마리아 할머니 주머니를 쳐다보며 내 마음을 읽고 있다.
월간 『참 소중한 당신』 2005년 2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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