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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길동무 얘기

< 부패로 이르는 네 가지 길 >

< 부패로 이르는 네 가지 길 >

우리나라는 종교의 천국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대세계에서 종교가 우리나라만큼 대접받는 나라도 없다 한다. 다른 나라들, 특히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종교가 이미 찬밥신세가 된지 오래인데, 후진국이나 미개국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는 한국에서는 오히려 종교가 엄청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당장 눈에 띄는 종교 건물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서구에서는 교회건물이 출석신자의 급감으로 인해서 음식점이나 기타의 용도로 활용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으리으리한 교회나 성당, 사찰이 연이어서 신축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들이 주일에는 출석하는 신자들로 가득 찬다.

그리고 각 종교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이 자기 종교의 덕택이라고 이야기하기 바쁜 것도 눈에 띈다. 유교자본주의라는 말은 유학자들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일반적인 학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언급하는 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도 우리나라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하느님의 돌보심이라고 이야기하기 바쁘다. 심지어 불교에서도 막스 베버의 불교 비판을 반박하며 불교의 경제적 기여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이 그 자체로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기왕이면 잘 사는 게 좋지 않은가? 그러나 외화내빈外華內貧을 염려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오늘날의 한국 종교 상황을 고려 말 불교계의 타락에 빗대어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외적으로는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교회나 절에 나가기가 주저되는 것은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이 화려하고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건물과 여러 가지 볼거리 때문에 다니거나 단순히 친목도모나 사업에 도움이 되니까 다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인로서의 진지함이나 치열함은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계와 관련해서 “아직도 교회에 다니십니까?”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한다. 뜻있는 사람은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절망스러운 것일까? 거듭 말하거니와, 기왕이면 잘 사는 게 좋지 않은가? 유교에서 공자나 맹자도 우선 백성들을 잘 먹인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앞에도 잠깐 언급했거니와 막스 베버는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함양을 통해서 경제발전을 추진한다고 명시하지 않았는가?

불교도 출가수행을 하기는 하지만, 부처님 당시부터 급고독 장자와 같은 거부巨富가 불교 교단에 많은 재물을 보시해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는가? 분명 부유함 그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닐 것이다. 기왕이면 따뜻한 방에서 거하며 편안한 침대에서 자고, 온갖 맛난 음식을 먹으며, 여러 가지 진기한 오락거리를 찾아서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 민족이 사시사철 굶주리지 않고 살게 된 것은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꿈꾸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요즘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어렵겠지만, 춘궁기에는 보리쌀 한 줌 없어서 풀뿌리까지 캐 먹어가며 연명해온 민족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의구심이 드는 것은, 너무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경도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종들의 역할이 그러한 세속적인 성공에만 치중되어 있다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저명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의 학설에 따라 이야기한다면, 종교의 역할은 가장 높은 단계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되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종교가 그렇게 고차원적인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불경에서도 음욕으로 괴로워하는 자가 있다면 이성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 음욕을 채워주고자 하는 것이 보살이라고 이야기하고, 관세음보살은 사람들이 온갖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종교의 보다 깊은 차원은 그러한 기초적인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는 데 있지 않을까? 특히나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욕구가 아니라, 불필요하거나 사치스러운 욕망을 추구하고 자기과시적인 부를 축적하는 데에 종교가 앞장서게 된다면, 그 종교는 이미 종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아야 하고, 불자라면 부처님을 닮아가는 데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버마(미얀마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억지로 붙인 이름이다)의 민주 운동가 아웅산 수지 여사의 저명한 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에서 인용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으로, 부패로 이르는 네 가지 길에 관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있다.

앙굿타라 니카야(Anguttara Nikaya, 북방불교의 증일아함경에 해당한다)에 실려 있는 짧은 경전에 담겨 있는 가르침인데, 사람이 부패와 타락으로 가는 데에 네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둘째, 사람들은 싫어함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셋째, 사람들은 망상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넷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그 넷 중에서 두려움을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라고 이야기하는데, 여사의 조국이 군부독재 밑에서 신음하는 것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세 요소가 그 두려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욕망과 싫어함과 망상은 두려움과 관련해서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추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에 견주어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적인 부유함의 추구에 매달리는 것은 그 동안 너무나 가진 것이 없이 살아온 체험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런 두려움에서 빈곤에 대한 싫어함이 있게 되고, 우선 많이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는 욕망과 망상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그래도 2006년도에 온 국민의 관심거리가 된 바다이야기 사건이나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쉽게 이해해주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두 가지 모두 정부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사건이기도 하지만, 그런 정부를 선택한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부화뇌동하고 심지어 악용한 국민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사행성 산업이 지나치게 번성하고 더군다나 그러한 산업이 탈법적으로 번져나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파트 가격을 올리려고 짬짜미까지 하는 것은 정말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그런 물질적 추구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종교계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입시철이나 취직 시즌에 합격과 성공이나 호언장담하면서 신자들의 헌금을 그러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하면 다소 지나친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좀 더 사람들의 마음을 맑고 순수하게 성숙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2009.6)

 

- 류제동 / 불교를 전공한 종교학자이며, 현재 서강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