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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길동무 얘기

순례는 외로워야 제격이다

순례는 외로워야 제격이다

 

픽사베이

‘순례’는 설레는 말이다. 언젠가 TV로 보았던 티베트 불자들의 순례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삼보일배하면서 걷는 그들의 순례는 불가사의였다. 성산(聖山) 카알리스 산자락을 애벌레처럼 기어가던 순례 모습에 저절로 헉 소리가 나왔다. 대체 신앙이 무엇이길래 저런 것이 가능할까 싶어졌다.

퇴직 후, 나 홀로의 순례를 꿈꿔본다. 일단 배낭을 걸치고 집을 나설 것이다. 갈 곳은 많다. 섬진강, 다도해 섬, 제주 올레길 등 세상의 길들은 나뭇가지처럼 퍼져있으니 말이다. 걸음을 내디디면서 대자연의 신령한 기운을 느껴볼 것이다. 동행자는 없어도 좋다. 순례는 외로워야 제격이니까.

유채꽃이 만발하던 날,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내가 속한 가르멜 재속회는 매년 짧은 순례 행사를 한다. 세례를 받은 지 삼십 년이 넘었지만, 순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불교단체와 함께 사찰 순례를 많이 다녔으니 이 또한 희한한 일이다. MB정부 때는 한강, 낙동강, 영산강 등을 살리기 위한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인 순례’에 몇 차례 참가했었다. 이번 성지 순례지는 목포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이었다. 그곳에 대한 풍문은 작년부터 들어왔다. 바티칸 교황청의 상징물이 부착된 준대성전, 명동성당보다 윗급이라고 했다. 대도시가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 건립된 큰 성전이란 말에 한 번은 들려보고 싶었다.

순례 행사 아침, 급하게 달걀을 먹다가 소금을 그릇째 엎고 말았다. 서두른 탓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미안하다는 메모만 남기고 집을 나서야만 했다. 다행히 휴일 아침의 도로는 한적했고, 신호등도 푸른빛으로 협조를 해주었다. 덕분에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금을 정리하고 나올 걸, 아내에게 미안했다.

9시 정각이 되자 일행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는 옅은 안개를 헤치고 달려갔다. 그날 내게는 2호차 버스 인원 파악이라는 임무가 주었다. 출발 한 시간 남짓 만에 산정동 성당에 도착해 보니, 연무는 날아갔고 하늘은 맑았다. 과연 산정동 준대성전은 풍문대로 우람했다. 입구에는 ‘가톨릭목포성지’라는 금빛 글씨가 반짝이고 있었다.

가톨릭 예수회 이냐시오성인이 수도한 스페인 만레사 동굴을 순례하는 여성.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나는 거대한 종교 건축물을 볼 때면 반감이 생긴다. 가령 바르셀로나의 파밀리아 성당을 영상으로 보면서 감탄은 하지만, 이는 미학적인 경외심일 뿐, 신앙과는 상관없다. 예전에 가야산 백련암에서 성철스님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윗동네 수령 동지라 불리는 거대한 조형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안군 청계면에 있는 디아코니아 자매회 예배실의 아름다움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언님’이라 불리는 개신교 수녀들의 신앙공동체인데, 그곳 예배실은 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원형건물이다. 서까래가 곁으로 드러난 천장과 그 중앙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빛은 일품이었다. 게다가 바닥 중앙에 놓여있는 멍석과 작은 나무 십자가는 소박미 자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대성전보다 인상 깊었던 곳은 광주대교구 역사박물관이었다. 1937년도에 건립된 붉은 벽돌 건물인데, 최초의 광주대교구청 자리였다고 한다. 세월이 묻어있는 박물관 지하 공간은 성스러웠다. 그 옛날 카타콤을 재현해 놓은 겟세마네 동굴과 작은 기도실은 디아코니아 자매회 예배실 분위기와 닮아있었다.

특히 겟세마네 동굴에서 본 십자 나무는 강렬했다. 바위에 드리운 십자가 그림자가 마치 성모마리아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건너편 토굴 기도실에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잠시 일행과 떨어져 그곳에 들어가 보았다.

티베트 성산 카일라스를 오체투지로 순례하는 순례객.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뒤늦게 일행을 찾아가 보니, 다들 도슨트(박물관 안내원) 설명에 심취해 있었다. 옆에서 들어보니 웬만한 강론보다 감명 깊었다. 안내가 끝나자 회원들은 도슨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그녀가 느닷없이 내게 “신부님이죠?”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일행들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이윽고 지하공간에는 웃음이 퍼졌고 나는 무안했다.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을 나서려는데 도슨트가 내게로 오더니 “신부님 같았어요”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성전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오르면서 신학교에 뜻을 품었던 젊은 날이 떠올랐다.

대성전에 들어보니, 제단 앞에 일행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단 옆에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었다. 프랑스 리지외 출신인 성녀는 가르멜 소속 수녀였고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돌아가셨다. 흔히 소화(小花) 데레사로 불린다. 성녀가 남긴 자서전은 가톨릭 신자들이 사랑하는 신앙의 고전이다.

가톨릭은 성인들의 유해를 보존하는 전통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골도 여러 조각으로 나눠 여러 성당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유해 흠숭 전통이 탐탁지 않다. 영혼이 사라진 육신은 허망한 것이 아니던가.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 작가도 어느 글에선가 이를 허망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나도 성녀 앞에서 손 모아 기도를 올렸다. 성녀의 정결한 신심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미사를 바친 후, 해상 케이블을 바라보면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신안 퍼플섬에서 거센 해풍을 맞으며 보랏빛 다리를 걸었다. 다들 바람에 밀려서 휘청대고 있었다. 흔히 세상살이를 세파(世波)라 하던가. 세상의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영혼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날려가려는 모자를 꽉 하니 움켜잡았다.

해거름 무렵, 신안군에서 선물로 준 소금 세트를 들고 귀가했다. 아내는 소금 세트를 받고선, "아침에는 소금 엎더니, 저녁에는 소금 가져왔네."라며 용서해 준단다. 마치 그분께서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소금’을 주신 것 같다. 이래저래 참으로 자상한 분이시다.

글 화개(사랑어린배움터 공동체원)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배움터 마루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