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 말라 3,19-20. 2테살 3,7-12. 루카 21,5-19)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입니다. 왜 우리가 가난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까?
답은 너무나 명료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모든 사람들에 가난을 살 것을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쭉 묵상해보면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사신 분이 또 없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봤을 때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은 절대로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를 축척하려면 한곳에 오래도록 터를 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땅값도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은 신혼 초부터 헤로데의 영아 살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삶의 기반을 옮겨갑니다.
거기서 꽤 머물렀는데, 이집트에서 공짜로 밥 먹여줬겠습니까? 요셉은 외국인 근로자로 열심히 일하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아기 예수님을 등에 업고 갖가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세상을 떠나자 나자렛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새롭게 거주지를 옮긴 두 분은 또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삶도 절대 부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노숙인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이 노숙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면서 굶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가끔씩 기회가 닿으면 양껏 드시는 장면이 종종 목격됩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그리고 사랑밖에 없었던 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누군가를 대신하여 당신 목숨을 내어놓는 일 밖에 없었던 사람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노숙인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시다 보니 또 다른 노숙인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셨습니다. 나병 환자들, 거지들, 갖은 종류의 병자들, 죄인들, 어린이들,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한번 훑어보면 이 사실은 명백하게 입증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주 드물게 고관대작의 집에 초대도 받으셨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하고 소외받은 민중들 사이에서 지내셨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주도권이나 기득권을 쥔 사람들 편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 편에 서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편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