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의 일상, 그 저녁 어둠을 걷다
오늘부터 매달 두 번째 월요일에 '신학 오디세이아 3'을 한 해 동안 연재합니다. 글로벌 시대의 인간성 회복을 꿈꾸며, 때론 낯설고 때론 사소한 일상에 깃든 생, 시간, 그리고 하느님나라에 대한 조그만 영적 단상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집필해 주신 박정은 수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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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느 계절이 되었든, 여전히 대림은 설레고 또 아름답다. 우리 동네 오클랜트 한인 성당 제대에 꾸며진 아주 소박한 대림환을 어린이들과 함께 바라보면서, 이 순간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대림의 추억으로 마음에 새겨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강론을 열심히 듣던 예쁜 꼬마가 한국으로 간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리고 보니, 우리가 살면서 짧게든 길게든 만나는 동안, 열심히 사랑하는 것이 가장 남는 일인 것 같다.
사랑하는 일은 늘 기다림을 낳는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했다면, 우리는 일생에 그 무언가를 애절하게 기다려 본 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난, 그리스도의 도래를, 이미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 않은 하늘나라를 애절하게 기다려 왔는지 스스로 물어본다. 그렇게 애절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하늘나라를 찾고 있다는 다짐을 해 본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를 찾아 나서고 싶다고 기도해 본다.
팔레스타인, 베틀레헴에 있는 루터교 기독교 교회의 제단 장식. 부서진 세상에 오셔서 페허 위에 몸을 누이신 아기 에수의 모습에서 강생의 신비를 본다. (이미지 제공 = 박정은)
예수님은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동네 언덕을 한참 걸어 올라가면, 마치 내가 어릴 적 살던 서울 어느 동네 언덕 같은, 가파른 그 길을 올라가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이 나온다.
늘 더운 그 동네에 매일 예수님은 탄생하신다.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그곳은 전쟁이고, 무죄한 아이들이 수난당한다. 그래서 우리가 꾸미게 될 구유가 무색하다. 하느님의 강생은 오늘도 일어나고, 그 기적은 우리가 그저 성당을 화려하게 꾸미는 구유와는 정말 거리가 멀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속에 가난한 구유하나 만들 공간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그리스도가 힘을 가진 왕으로 오신다면, 덜 미안하겠는데, 너무나 연약한 아기로 오시니, 더 미안하기만 하다.
벌써 두 번째 대림초를 붙이면서, 온 세상의 교회는 함께 평화를 기원한다. 너무 평화롭지 못한 세상이라, 이 기원이 더욱 간절히 다가온다. 특히 이번 대림 2주에는 인권과 하늘나라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묵상한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동등한 권리에 매우 익숙한 우리에게 이 이미지는 무언가 편하지 않다. 왜 산과 언덕을 낮아지라고 하는가 하는 질문이 든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전반적인 이사야서에서 보여주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전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하늘나라,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는 누구나 값없이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풍요로움이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위해, 산 위에서 호사를 누리는 사람은 조금 아래로 내려와야 하고, 산을 깎은 흙더미로 깊은 골짜기는 메워져, 깊은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이 평지에 올라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두 똑같은 양을 취하는 나라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을 넉넉히 모두가 취할 수 있는 나라이다. 그것은 하늘나라 공동체의 사회 윤리다. 사막에서 만나를 먹는 이스라엘이 누구도 더 가진 자 없고, 누구도 부족한 자가 없었던 것처럼.
성 오거스틴 수도 규칙서에서는 가장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는 구절이 있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이 정말 얼마나 될까? 사하라 사막 모래 더미에서 피정하면서, 정말 내가 필요하다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의미 없이 느껴졌었다.
물론 사막을 떠나면서, 다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당당하게 그 이유를 대면서 다가왔지만, 그때 내가 가졌던 느낌, 그저 내 추위를 막아줄 담요 한 장이면 족하다는 그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런 면에서 복음은 상당히 급진적이다.
많이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 부자인 나라, 많이 가진 사람들은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나라. 그래서 하늘나라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기 있는 나라가 아닐지도 모르고, 중산층화된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하늘나라가 불편할지도 모른다.
요즈음 소셜 미디어에 잘 오르는 해시태그는 “이 세상 무고한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내 아이들만 즐거운 성탄을 맞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다. 특히 어둠을 밝히는 불을 켜는 이 주간에, 서로의 어둠을 밝히는 나눔을, 특히 교회의 어린이들과 함께 실천해 가고 싶다.
아이들은 훨씬 하늘나라와 가까우니, 그들에게서 하늘나라의 감수성을 배우고 싶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선물로, 예쁜 미소 5번이라고 적었던 그 옛날 주일학교 어린이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내가 사는 앨러미다는 눈이 오지 않는다. 그래도 성탄과 산타, 눈사람이 어둠 속에 빛을 발하고, 나는 빛의 의미를 헤아려보며, 밤 산책을 나선다. ⓒ박정은
서둘러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12월의 거리를 걷다 보니, 많은 사람이 성탄을 장식할 트리를 사서 차에 싣고 달린다. 물론 아주 익숙한 12월 풍경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집 안팎을 성탄을 주제로 장식한다. 밤새 내내 전등을 밝힌 집들은 어두워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을 밤새 걸어 다녀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동화 나라를 걷는 것 같은 이 빛의 축제를 무어라 할까. 그저 멋진 계절 의례라고 하면 될까. 그런데,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어둔 밤 불을 밝히며, 어둠에 묻힌 이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절절한 마음이 사라진 채, 혹은 어떤 상징이 그 의미를 상실한 채, 이미지만 남은 꼴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은 묵을 곳이 없이 여행해야 했던 한 부부가 마구간이란 남루한 곳에서 아이를 낳은 현실이 우리의 교회에, 상점 윈도에, 그리고 동네 어느 집 정원에 낭만적으로 혹은 상업적으로, 그것도 아니면 그저 습관적으로 꾸며지는 장식이 된다면, 강생의 신비가 그 의미를 잃은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장식이나 불빛이 아니라, 지금 가자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 앞에, 예수 강생의 신비가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 동네 성당의 아주 소박한 대림환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걸까. 수녀원 곳곳을 장식하던 우리 수녀님들도 올해는 장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속에 구유를 만들어 가기로 했다. 나도 성당에서 준 대림환에 초를 붙이고, 고요한 가운데 대림에 만나고픈 성서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초대해 본다.
잉태한 마리아를 환대한 엘리사벳이 떠오른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당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마니피캇"을 노래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즈카르야는 어둠 속에 묻힌 사람들이 모두 빛을 볼 것이라는 찬가를 불렀다.
그리고 사막 지역의 추운 밤, 양을 지키던 목동들도 생각한다. 초라한 현실이 갑자기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나라를 만나며 그들이 느꼈을 전율을 생각한다.
그리고 삼왕을 생각한다. 만일 여자 삼왕이 온다면,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요긴한 기저귀나 배냇저고리, 분유 등을 가져왔을 것이고, 좀 더 일찍 도착해서, 미역국도 끓이고, 마구간 청소도 해 주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도 한다.
그러면서 가난과 폭력으로 부서진, 이 어둡고 아픈 세상에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가 임하시길 기원한다.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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