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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길동무 얘기

정치의 부작위에 책임을 묻는다

 

사유와 성찰

정치의 부작위에 책임을 묻는다

아침 출근 자가용에서 라디오를 켰다. 클래식 라디오에서 해설은 없고 음울한 음악만 흘러나왔다. 눈물이 쏟아졌다. 학생들을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사드가 불법으로 들어가던 2017년 4월과 9월, 밤새 성주 소성리에서 경찰에 짓밟힌 몸으로 눈물 흘리며 익산으로 차를 몰던 그때가 떠올랐다. 주민 100여명밖에 살지 않는 시골에 국가는 1만여명의 경찰을 두 차례에 걸쳐 밀어넣었다. 이태원 참사 때는 경찰 인원이 100분의 1에 불과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국가의 부재가 아니라, 권력자들에 의한 선택적 취사인 것이다.

교양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선생으로, 이 사회구조를 만든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서 강단에 설 자격이 없다. 여러분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만약 우리 젊은이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오늘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국가는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한다. 고장 난 이 체제는 여러분의 체제가 아니다. 부조리와 불의의 사회 체제를 다 붕괴시켜야 여러분이 살 수 있다. 학기 끝날 때까지 내가 말하는 내용은 어른들의 가면이고 위선이므로 기억도 하지 말라. 이제 어디 얼굴 들 곳도 없다고 했다.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2010년 천안함 침몰, 2014년 세월호 참사, 그리고 이태원 참사는 이 나라가 민초들의 떼죽음이 예비된 상시적 재난국가임을 보여준다. 더욱이 매년 군대에서 수백명, 노동현장에서 수천명, 교통사고로 수천명, 자살로 수만명이 이 나라를 원망하며 하늘로 떠나고 있다. 지금도 어디선가 꽃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목숨들이 한을 품고 사라지고 있다. 그들에게 헌법 34조 6항의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구절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라는 있되 유령의 나라인 셈이다.

이미 주위에서는 이 사회가 붕괴되고 침몰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형교회와 대기업은 자식이 대를 잇고, 고위직과 정규직과 돈이 되는 직업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연줄로 훔치고 돈으로 사고판다. 이 순간에도 온갖 카르텔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고 있다. 부패공화국의 오명은 세계로 퍼져나간다. 교실의 가르침과 현실은 정반대다. 그 정점에 정치가 있다. 위정자들은 자식처럼 백성들의 애환을 보살펴야 함에도, 대낮에도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린다. 권력 행사에만 관심이 있고, 그 권력을 어떻게 해야 잘 쓰는지도 모르는 미성숙한 모습뿐이다.

묻는다. 당신들은 국민의 봉사자인가, 국가의 통치자인가. 전자라면 ‘국정 사령탑’과 ‘재난 컨트롤타워’의 차이는 무엇인가. 과연 사람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가. 그저 국정 사령탑에 앉아 숫자, 도표, 그래프로만 생명을 이해하는 영혼 없는 정치가들에 불과한가. 후자라면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보여준 입법·사법·행정 삼권을 다 쥐고 싶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이고자 하는가. 그의 꿈은 야만의 세계에서 보호의 명목으로 맺은 시민계약에 의한 절대적 통치자다. 철 지난 이 국가론은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합법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까지 우리는 국가의 잘못된 행정에 대해서는 작위의 책임을 물었지만, 정치의 부작위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았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대통령의 명으로 힘 좋은 군함 몇 척 보내 뭍으로 밀어올리면 되지 않았을까. 이번 이태원 참사 때는 휴대폰에 비상재난신호와 메시지를 보내 뒤로 흩어지라고 호소하면 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푸념이지만 위정자들의 권력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닌가. 재난에 대한 국가 책임은 무한하다. 아, 슬프다. 어린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듯 위험에 처한 백성들을 보살피며, 고통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정자가 정녕 이 나라에는 없단 말인가.

재난에 관한 각종 법률이 있어도 이를 운용하여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정치의 기술이다. 우린 불모에 처한 이 나라의 정치에 많은 것을 기대했다. 민주적 절차만으로 선출된 무능한 대표에게 안전에 대한 신뢰를 덥석 던져주었다. 그러나 위임된 권력은 그들의 욕망만을 충족시켰을 뿐 우리에겐 환원되지 않았음을 보았다.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평등, 평화와 안전은 여전히 권력의 놀음 위에 놓여 있다.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위정자는 필요 없다. 죽은 백성들을 살려내든가, 아니면 모든 권좌를 백성들에게 돌려달라.

  • 경향신문 기고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