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님을 보내 주시어 저희 교우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신유박해로 하나뿐인 목자 주문모 신부를 잃은 조선 신자들이 1811년 성직자 영입을 청하기 위해 북경교구장(수자 사라이바 주교)과 교황(비오 7세)에게 보낸 편지. 이른바 ‘신미년 서한’이라 불린다. 신유박해 당시 극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은 신자들 수와 그들의 생전 공적 등을 담았다. 특히 주문모 신부·강완숙·윤점혜·이순이·정약종·최필공·황사영 등 7명과 더불어 박해 당시 성인처럼 시종일관 굳세고 바른 자세를 보인 순교자 43명의 행적을 실었다.
북경 주교·교황에게 성직자 파견 다시 청원
목숨을 건 피난생활을 하면서 겨우 교우촌을 일구어 가며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은 찢긴 기도서를 찾고, 다듬어 기도의 삶을 이어가면서, 다시금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성직자를 파견해달라고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신태보와 이여진 등의 신자들은 1811년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조선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선교사를 파견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신자들은 어려운 살림에 봉헌금을 모아 북경에 가는 경비를 대고, 이여진은 밀사로 자원하여 두 통의 편지를 들고 출발하였다.
먼저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전하면서 선교사를 파견해달라고 청하였다. “저희는 아주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인데, 처음에는 책을 통하여 거룩한 교리를 배움으로써(書籍開敎),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처음으로 칠성사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천만다행으로 성화될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사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책을 통하여 성교회의 도리를 찾아 구한 것은 오직 우리나라뿐이옵니다….”
선교사 없이 천주교 서적을 통해 시작된 한국 교회의 특별한 기원을 얘기하면서 1801년 박해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어 교우들이 뿔뿔이 흩어져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남해안과 서해안을 통한 선교사의 입국 방안을 제시하였다.
비오 7세 교황(재위 1800~1823년). 교황은 유럽 대륙을 장악한 나폴레옹과의 대립으로 인해 1809년 납치, 감금됐다. 교황령도 모두 프랑스에 합병되고 말았다. 교황은 곧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옮겨졌다. 이 때문에 교황은 신유박해로 무너진 조선 교회 재건을 위해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였다.
서해안 뱃길 통한 선교사 입국 방안 제시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왼쪽에 있는 남경과 오른쪽에 있는 유구(琉球) 섬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항해하다 보면, 며칠 안 가서 우리나라 남해안에 닿게 될 것이옵니다. 남해안에서 서울까지는 천여 리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서해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만 못하옵니다. 왜냐하면, 서해안에서 서울까지는 백 리도 채 안 되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나 뱃길을 통해서 선교사가 들어오게 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서해로 개척 이후에 가능했다. 뱃길은 정확한 항로가 아니면 풍랑과 암초의 위험 때문에 초기에는 가급적 육로를 이용했던 것이다. 조선 교우들은 선교사들이 배를 통해서 들어올 때, 가능하면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덧붙였다.
“저희에게 배를 보내실 때는 반드시 한문에 능통하고 상황 파악을 잘하며, 우리나라의 법령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와서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런데 편지를 쓰실 때에는 우리나라에 온 목적이…. 성교회를 전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 나라를 보존하며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밝혀주시기 바라옵니다….”
긴 박해 기간 조선 교우들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토록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이었던 천주교의 가르침을 마음 놓고 믿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교우들이 북경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큰 배와 조선 임금께 보낼 선물과 함께 뛰어난 학자와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한 것은 무력적인 시위가 아니라, 참된 종교인 천주교가 조선 정부를 위해서도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단 한 번도 이러한 청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후에 병인양요 때 오히려 강화도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방식인 군함으로 왔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더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서한의 결론 부분은 선교사를 꼭 보내달라는 간청으로 끝나고 있다.
“…교우가 천 명이 넘으면 신부님을 한 분 보내 주시고, 만 명이 넘는 곳에는 주교님을 보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신자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사옵니다. 하지만 저희는 천주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만 명도 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착한 목자의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하루빨리 신부님을 보내 주시어 저희 교우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1811년 당시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 마카오에 머물고 있던 사라이바 주교는 한문으로 쓰인 ‘신미년 서한’을 중국인 통역 도움으로 포르투갈어로 번역한 뒤 원본과 함께 교황청으로 발송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을 겪고 있던 교황청과 유럽 교회는 조선을 위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라이바 주교는 교황청 포교성성에 서한을 보내며 조선에 선교사 2명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보고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1801년 박해 상황과 순교자 공적 등 담아
이렇게 교황에게 올리는 편지를 정중하게 준비한 후에 북경 주교에게도 좀더 구체적으로 편지를 올렸다. 1801년 박해 상황과 많은 이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했음을 보고했다. “온 나라가 이 대박해에 참가하여 어느 좌중에서나 박해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나이다. 훌륭한 교리와 교우들의 좋은 모범을 모든 사람이 보고 듣고 하였사오며, 교우들의 비장한 설교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나이다.”
교우촌에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신자들은 대박해 중에 목격했던 놀라운 신앙의 증거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신심을 다시 일으켰지만, 목자 없이, 성사(聖事) 없이 살아가는 삶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성사를 받을 길이 전혀 없는 저희여서 임종 시에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옵니다. 전대사가 붙어 있는 성물을 가질 수가 있다면, 저희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저희의 신망애 삼덕을 굳게 하는 데 도움이 되겠나이다.”
당시의 신자들은 죽음에 임할 때의 마음가짐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신자들은 상등통회에 의지하거나,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교황 성하께 별도로 편지를 보내는 점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였다.
“교황 성하께 글월을 올리는 것은 저희 처지에 크게 지나친 일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저희가 처하여 있는 사정으로는 달리할 수가 없었나이다. 저희의 편지를 번역하시어 교황 성하께 보내드리시기를 주교님께 청하나이다. 이것은 저희 비천한 가운데에서 천주의 지상 대리자시요 우리 행복의 원천이 되시는 그 어른께 드리는 효성의 조그마한 표적이옵니다. 저희의 사정이 그 어른께 소상히 알려져서 저희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게 되시기를 바라나이다.”
이처럼 북경 주교에게 조선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면서 교황님께 올리는 편지를 대신하여 선교사가 들어올 수 있는 여러 방안에 대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 편지가 바로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또다시 10여 년 후인 1825년 전후에 쓰인 유진길의 편지가 교황청에 도착하고, 그러한 조선 교우들의 편지가 조선대목구(1831년) 설정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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