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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을 만드는 수행 >
최근, 현대인들은 수도승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었던 수행 방법에 대하여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Temple Stay등 다양한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수행이라는 대중적인 이미지란 것은 수도승들이 참구參究하는 생사해탈이나 아니면 이상적인 체험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여, 거리감이 없지 않았으나 요즘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정신건강을 위하여 절대 필요하다는데 공감을 한 듯 동서를 막론하고 종교를 초월하여 선이며 명상에 많은 관심들을 갖는다.
그것은, 현대 생활을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며, 밝고 따뜻한 인간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광의의 의미로 사람다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수행이란 것은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하였다
諸行無常. 사람의 모습이며 마음이며, 일체의 모든 것들이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어 고정불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諸法無我. 이렇게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변하듯 사람의 운명이란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인연을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닌 사람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보호와 교육을 받고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더불어 공생하다 사람들의 품속에 파묻혀 죽어가는 것이 사람들의 일생이 아닌가,
언젠가는 어느 성형수술 중독자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 백날 고치고 치장한들 만족할까 싶다. 고칠수록 치장할수록 자꾸 하고 싶어지는 것들이 인간의 욕심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란 아무리 가리고 가려도 태어남 그 자체부터가 피투성이 인생이 아니던가, 나는 승속을 막론하고 치장하지 않은 순수한 사람을 보면 친근감을 느낀다. 그런 것은 다양한 환경 속에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던 사람들의 솔직한 모습들이 나를 감동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정체된 자신의 내면을 외모의 변화를 통해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수행이란 것은 치장하지 않은 자성自性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인데, 애써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잊으려 할까?
옛글에 사람의 운명론에 대하여 이런 글귀가 있다.
족상足相보다는 수상手相이요 수상보다 면상面相이나, 면상보다 심상心相이란 말이 있다. 즉, 발이며 손이며 얼굴상이 좋다하여도, 운명을 만들어 가는 근본은 심상이란 것이다. 운명이란 겉모습을 바꾼다고 바뀌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운명의 근본은 잠재된 심상에 있기 때문이다. 인생살이 뜻대로 안된다고 괴로워 할 것도 아니다. 자신들의 심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수행을 하다보면 어느덧 삶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깨우치게 될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는 심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수행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참회란 것을 통해 숙명적인 업을 소멸하고, 원력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기독교의 회개라는 것도, 속진의 때를 씻어가며 성령의 은총을 받자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수행들은 사람의 운명을 변화시켜 나가는가 하면 우리 사회를 정토 사회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훌륭한 수행법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복이라 하면 어떤 것을 말할까, 그것은, 재물이나 명예, 권력, 건강, 자손 창성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를 충족하지 못할 때 많은 사람들은 번민과 고뇌를 한다.
행복의 가치란 물질이나, 생각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종교적인 가치든 철학을 통해 내심낙원을 이뤄 나갈 때 가능한 것들이다. 또한, 이러한 원력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보다 눈 밝은 스승을 만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고 그것은 인생의 가장 큰 복이라 할 수 있다.
나는 30여 년 전, 산문에 들어와, 생사해탈이란 인생의 근본적인 과제보다 신비한 도교적인 정서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당시 선지식께서 주셨던 화두는 뒷전에 두고, 엉뚱하게 도인이 되겠다며 토굴에 들어가 단전호흡을 하며 도인수련법을 했었던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열심히 수행을 하다 보니 삼매라는 묘한 체험을 하였는데, 그 마음자리를 문자로 형용할 수 없으나, 편안하고 한가로워 선지식께서 주셨던 무無자 화두를 들며 정진을 하였었다. 경전으로 말로만 듣던,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黙動靜에 소소영영한 화두의 성성星星한 것이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 눈앞에 있는 듯 환희심歡喜心에 가득 차 도를 깨달았다는 착각을 하였던 적이 있다.
몇 달 후 이러한 현상들은 수행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깊은 선미禪味를 느끼며 문자와 언어를 떠난 체험들은 아직도 나에게는 잊어지지 않은 수행담이다. 그러나 훌륭한 선지식을 만났다면 좀 더 심도 있는 수행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들이 적지 않았다.
이후, 자연 속에 사색하며 자연은 나의 스승이란 생각을 가졌고 자연을 벗 삼았다. 언젠가는 설악산의 아름다운 단품들이 물들었을 때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봉정암 참배를 하기 위해 백담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런데 많은 참배객들이 새벽같이 일어나 봉정함을 향해 바쁜 길을 떠난다. 물론 6~7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서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쁘게 목적을 향해 길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면, 사리탑은 친견할지언정 설악의 아름다움은 잊은 듯 하다.
목적도 중요하지만 과정에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나도 늦은 시간이지만 걸망을 메고 울창한 단풍 숲에 기암괴석들이 어우러진 설악의 아름다운 계곡의 물소리며, 새소리, 자연의 생명력은 부처님의 법음으로 들렸다. 사리탑을 참배하면서 역대 선지식들께서 왜, 험준한 산중에 사리탑을 세웠을까? 자연을 벗하니 의문들이 풀리는 것 같다.
요즘, 절 집안에 간화선이 어렵다며 남방 불교의 전통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유행을 따르지 않더라도 수행의 진수를 느끼지 못할 때는 자신의 수행 방법에 대하여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사색을 벗 삼아 자연을 스승으로 운수행각을 하면서 선지식을 찾으려는 구도정신이 필요하다. 수행이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위험 부담을 감수하여야 한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눈 밝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세상의 가장 큰 복이란 생각을 갖는다. 그러한 복이 없다는 생각을 가질 때, 탁마를 주고받을 수 있는 도반을 만나기도 하고, 그 복마저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내 스스로 마음의 수용력을 넓혀나가는 도량을 가지며 대자연을 스승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쳐놓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오히려 미혹하게 된다. 마치, 일시적인 마술사의 공연을 보듯 없는 것이 있는 듯 집착하게 되고, 허망무실虛妄無實한 환상에 빠지게 될 우려들이 없지 않아 매우 경계할 일들이다.
내가 보았던 수행자상을 생각해보면 도반이 떠오른다. 그 친구는 수행 환경에 그리 구애를 받지 않는 듯하다. 해제 철이 되면, 가끔 내가 있던 절을 찾아오기도 했는데 참 절제 있게 생활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무엇이든 인연이 있으면 있는 데로 없으면 없는 데로, 그저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듯 어느 날 훌쩍 떠나 버린다. 마치 자연과 하나 되어 무애자재한 수행자처럼 말이다.
언젠가는, 문중 절에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며 열심히 불사도 하고 포교를 하더니 어느 날 주지 만기를 마치기도 전에, 그만 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너무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고 안일해져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걸망을 메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인연이 다했구먼. 하였지만, 소유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이런 수행자가 아니면 어디 그런 마음이나 낼 수 있을까 싶은 것이 도반이지만 참 멋진 수행자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 매력을 느낀다.
이제, 선원에서는 구참이 되었다. 보통 구참이 되면 번거로운 대중생활을 벗어나 자유롭게 정진할 수 있는 생활을 할 법도 한데, 아직도 절제 있는 생활 속에 게으름을 막겠다며 선원에서 몇 철씩 난다. 그런가 하면 나이가 들어도 불안하지 않은 듯, 항상 가난하려 하고 때로는 전국을 유행하는 모습을 보면 수행자란 이렇게 걸림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무릇 수행자의 길이란 것이 “무상의 본질을 성찰”하고 그러한 깨달음을 “물질적인 소유만으로 느끼지 못하는 가치”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을 깨우쳐 주어야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더러는 우리 주변에 수행자라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이기에 집착하여 사회적으로 추한 모습들을 드러내며 수행자임을 스스로 망각하는 행위를 돌아보면 버릴 때 버릴 줄도 아는 것이 참 수행자가 아닌가 싶다.
사원이란 수행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보다 가치 있는 삶으로 발전시켜 나가려고 심성을 순화하는 수행을 한다. 수행자들은 이들에게 공동체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고 이타적인 자비심을 배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때, 많은 사람들은 사원의 존재와 역할에 감사하고 공덕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어느 선지식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세상에 평등한 것이 있다면 “내가 행복을 바라며 고통을 피하려 하듯, 다른 사람 또한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행복이란 추구하는 만큼이나 불행이 따라 다닌다. 오히려 수용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자비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수행이란 자신의 운명도 사회도 바꿔 나간다. 그래서 경전에는 내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心淸淨 國土淸淨하다는 말이 있다.
- 금담 스님, 현재 남양주 무량사 주지와 (사)<천수천안> 이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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