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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살(靈魂)찌우기

너희는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는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언가 하느님에 대해서, 혹은 교회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감을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름 분발하여 열심하게 살고 싶을 때, 그런 느낌은 더한 법인 것 같다. 가령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 보려고, 시간을 떼어 놓았는데, 그럴 때 누군가가 다가와 도움을 청하면, 내 기도 시간을 놓칠 때, 굉장히 신경이 쓰이고, 속이 시끄럽다.

모처럼 기도를 하려고 잘 빼 놓은 이 시간에 왜 하필이면 이때 왜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미는 건가 속이 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이, 내가 정한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착각이다.

언젠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종신 부제이신 분의 사모를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분과 깊은 교감을 했는데, 그분은 기도에 대한 깊은 갈망을 가진 분 같았다. 일을 해야 하고, 살림을 해야 하며, 또 교회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언제나 자신은 편안하게 기도를 할 수 있을까를 늘 마음 끓이다가, 결국 자기가 하는 사소한 일들이 기도임을 깨달았다고, 그 후론 낙심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들려주었다.

사실, 어찌 들으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하는 기도, 내가 봉헌하고픈 시간과 공간을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로 내어 드릴 때, 그것은 깊은 기도이고 거대한 미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그 순간 마음을 들어 올리는 일, 그 단순한 소명으로 우리는 다 같이 불리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과 머무시다가 하늘에 오르시는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건 분명 평생 가슴에 묻고, 질문해야 할 그런 체험이었을 것이다.

나라면, 이 엄청난 시간을 멈추어 주십사고 기도했을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예수님을 잡아 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아서 말이다.

그런데, 하늘로 오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은 이제 의미가 없다. 그 대신 그분의 현존을 내 일상 속으로 모시고 오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가 이 순간을 상상력을 발휘해 그리기도 했는데, 이 순간은 이제 우리의 눈에 잡히거나 보이는 예수를 만나는 마지막 순간이다. 그런데 이 순간에 집착을 하는 것은 또 무언가 한참 감을 잘못 잡은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다지 맑지 않아도 괜찮아. 생명을 키우시는 분 안에 거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 속에, 어쩌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생명을 우리가 안고 있는 건지도 몰라. 높은 하늘 아니고, 낮은 그리고 작은 연못에 살고 있는 생명을 발견하는 마음이 예수 승천을 사는 마음일 거야. ⓒ박정은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본질을 보라고 우리를 부르는 천사의 모습을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헬로우~” 하면서 저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좀 보라고 위를 보기 좋아하는 우리의 시선을 아래로 인도하는 어떤 음성을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낙화를 묵상하는 시선, 그리고 일상을 품고, 생명을 길어내는 그런 작업을 빨리 서두르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천사를 시선을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지금 미국 장상연합회 수녀님들께 신학적 묵상을 나누어 드리고 있다. 계속 삼 주간 미국 수녀회의 지도자 수녀님들과 함께, 수녀원이 문을 닫는 경우를 포함해 21세기에 어떻게 미션을 사는가 대해 식별하면서, 수녀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곳 세인트루이스의 회의장엔 아주 야트막한 호수가 있었는데, 하루하루 그곳을 걸어다니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깃들어 있는지 쉬는 시간마다 산책을 하며 찾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순간에도 꼼짝하지 않고 알을 품은 오리도 놀라왔고, 커다란 거북이도 경이로웠다. 물가에서 자라는 나뭇가지 사이에 깃든 새들도 아름다웠다. 생명이 없을 것 같은 그 별 볼 일 없는 장소에 깃든 생명들을 만나면서, 수도회의 미래나, 수도자의 미래도 그저 하느님이 돌보는 생명의 나라에 깃든 작은 생명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꽃은 땅을 향해 가볍게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다. 새 잎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 위해 가벼운 나비의 날개짓을 배우고 있다. 생명 속에 산다는 것은 시간을 알고 또 포기할 줄 아는 일.(se lassier tomber) ⓒ박정은

처음에 수녀님들은 심각해 보였다. 수녀회는 노령화하면서, 어떻게 문을 닫아야 하는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미션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분들은 우리가 모두 함께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원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수녀님들은 깔깔 웃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 법학자 수녀님 다섯 분과 진행을 했는데, 영성학자인 나의 언어와 교회법 학자인 그분들의 언어가 매우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모든 작업은, 사랑이란 두 글자에 담긴다는 데에 모두 공감했다.

수녀님들은 마지막 시간에, 서로 입을 모아 교회법적인 절차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결국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 탄생할 거라는 기대감 속에 담담히 기다리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팔순이 된 원로 교회법 박사 낸시 수녀는, 나는 새롭게 나타나는 이 성령의 움직임을 보지 못할 것이라 애석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하늘을 가리키며, 자신은 지금과는 다른 각도에서 어떤 수도생활이 탄생할지를 지켜볼 거라고 이야기했다.

해가 쨍쨍한 날도, 폭풍우 속에서도 꼼짝 안 하고 알을 지키는 엄마 오리. 일상의 곤고함이 거룩해지는 일이란 결국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일. 누구보다 열심히 알을 품었던 미국의 수도회들. 그분들의 모습이 오리에게서 겹쳐 보인다. ⓒ박정은

초대 교회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이 세상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음성을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놀라움을 준다. 제자들이 완벽해서 말씀이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싸우고 서로 헤어졌고,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없었다. 그럼에도 말씀이 퍼져 나가는 데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머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를 감싸는 하느님의 손길은 여전하시다. 그래서 그 이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랬듯이, 한 세대가 가고, 또 새로운 세대가 오듯이, 어떤 수도회는 하느님나라를 꿈꾸며 미션을 종료할 것이고, 또 어떤 수도회는 글로벌은 미션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무엇이어도 좋다, 나의 수도회가 무엇이 아니어도 좋다.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깃든 생명을 가꾸는 일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마치 숨은 보물을 찾듯, 눈을 크게 뜨고 초라한 우리의 일상 안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우리를 잔잔한, 그러나 찬란한 일상을 만나는 일이다.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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