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시대 길동무 얘기

5월 끝자락의 노란 물결, 노무현을 그리며

5월 끝자락의 노란 물결, 노무현을 그리며

더는 서럽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15주기 맞아

그날, 장(章)의 시간에 서서 서해 낙조를 쓸쓸히 쳐다봤다

5월이 무척 깊다. 아름다운 대자연의 5월이지만, 한국사의 5월은 피로 얼룩져 있다. 4월 못지않게 잔인한 한국사의 5월, 이제 뭐가 더 남아 있을까 할 끝자락에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추가된다.

많은 미국 사람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그때 나는 무얼 했지를 떠올린다고 한다. 2009년 5월 23일, 한국 사람도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그날 자신이 어디에 있었고, 무얼 했는지 떠올릴 것이다.

옛 직장 동료는 그날 회사 행사로 문경에 갔다가 버스 안에서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나는 그날 아침 황망한 소식을 듣고 저녁에는 시골인 화성시 서신으로 갔다.

한 사람에게 음력 생일과 양력 생일이 같은 날은 태어난 날로, 그 주기가 19년마다 한 번씩 찾아온다. 이런 주기를 ‘장(章)’이라고 하며, 우리가 새로운 ‘장을 열었다’라고 할 때, 또 책을 읽을 때 ‘1장, 2장’ 하는 것도 그 주기와 관련되어 있다. 그날은 내 생애 주기에서 그런 날이었다.

저녁에 궁평항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서해 낙조는 처연하기만 했다. 궁평항 저 건너편 미 공군 쿠니 사격장으로 고통받았던 매향리 출신의 안치환도 불렀던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의 가사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누워 쉬는 / 서해의 섬들 사이로 해가 질 때 /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 해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우리 시대의 노무현

요즘도 노무현의 '상록수'를 들으면 가슴이 찡하다. 노무현은 정말 상록수 같은 사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마포구에 차린 빈소를 찾았다. 노제가 있던 날, 다행히 회사에서는 참석할 사람은 다녀오라고 했다.

그날 시청 광장의 노란 물결 속에서 나는 노란 종이비행기 하나를 가져왔다. 그렇게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 대단한 열망과 승리의 기억을 남겨 주었던 ‘아름답고 선한 사람’, 내 손으로 처음 뽑았던 대통령 노무현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노무현 대통령 노제 때 받았던 것들. ©김지환

노무현, 그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88년 5공 청문회였다. 무척 촌스러운 한 사람이 통일민주당 부산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며 5공 청문회에서 논리 정연하고 호소력 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뭔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밀려왔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노무현은 청문회보다 직업병의 상징이었던 ‘원진 레이온’ 같은 노동 현장에 더 신경을 쓰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문회 스타’ 노무현은 한국의 시민에게 깊은 눈도장을 찍었다.

1991년쯤인가 당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 별밤 특강에서 노무현이 나온다. “저 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데, 오늘 여기 오니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빛이 별입니다.” 얼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자신이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 시험을 쳤는데 시험에 떨어져서 좌절한 이야기,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한 이야기 등 인간 노무현에 관한 잘 알지 못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988년부터 내내 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여느 정치인과 다른 행보를 이어간 그를 지켜보았다.

통일민주당의 3당 합당 의결에 반대하는 노무현. 노무현의 정치 역정에서 기억에 남을 장면으로 이때부터 노무현은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 MBC 경남 뉴스 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 갈무리)

그는 계속해서 자빠지고 일어선 사람이다. 국회의원에 두 번 당선되었을 뿐이고, 계속해서 낙선하다 보니 자칫 정치 낭인처럼 비치기도 했다. 갈수록 살림도 줄어들고 나중에 해양수산부 장관을 할 때, 월급이 따박따박 나와서 권양숙 여사가 그렇게 반겼다고 한다.

노무현은 당장의 이익보다 정치 신념을 소중히 여기며 시대를 깊게 응시한 예언자적 정치인이다. 그런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노사모’가 결집된 것이다. 노무현은 우리 세대를 마구 설레게 했던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그때 노무현은 우리를 설레게 했던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2002년 국민경선은 위대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노무현을 새천년민주당의 후보로 뽑기 위해 국민경선단에 신청하기도 했는데, 매주 열리는 경선을 보며 환호했다가 탄식했다가를 반복했다. 경선 초 노무현의 승리 확률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광주가 그에게 손을 들어 주면서 힘을 받고, 경쟁자 이인제를 압도하면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노무현 후보를 두고 당 안에서는 마구 흔들어댔다. 당이 그리고 보수 언론이 노무현을 마구 흔들 때 문성근은 ‘왜 노무현인가’를 절규하듯 토로하며 강렬한 지지 연설을 했다. 정말 대단한 연설이었는데 월급 100만 원도 못 받던 시절 7만 원, 3만 원 나눠서 10만 원을 노무현 캠프에 보냈더랬다.

돼지저금통 하나를 얻어 직장 사람들에게 동전을 모으기도 했고, 노무현의 선거 유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곤 했다. ‘지금 우리는 왜 노무현을 선택해야 하나?’ 하며 인터넷 카페에서는 격렬하게 토론하고 논쟁했다.

2002년 월드컵 4강이 뭐라고 정몽주의 지지율이 날로 치솟는데, 노무현은 단일화를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던 정몽주와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 발표 때, 정말 떨렸고 그 결과에 무척 기뻤다. 그런데 정몽준이 공조를 파기한 그날 밤 잠도 못 자고, 인터넷에서 뜨거운 이야기가 오갔다. 새벽에야 겨우 잠들고 투표장으로 향했다.

성호를 긋고 투표 용지에 도장을 찍는다. 정말 그만큼 간절했다. 게다가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또 투표하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정말 결과를 알 수 없었는데 결국 노무현이 승리해 같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게다가 몇몇 지인에게서 축하 전화를 받았다. 나도 전화를 하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 축하했다. 각자의 간절함은 모이고 모여 강물이 되고 바닷물이 된다. 소중한 승리의 경험이었다.

2004년 3월 12일 어이없는 사유로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찬성 193, 반대 2표로 가결했다. 텔레비전으로 그 장면을 보는데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저녁에 국회 앞으로 달려갔다.

다시 촛불의 함성이 광장을 뒤덮었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시민들은 결정적인 시기마다 대단했다. 탄핵 국면의 힘으로 민주 진영이 과반을 차지하고, 민주노동당 의원 10명이 국회에 입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왼쪽부터)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다음 날 '한겨레' 1면. (두 번째부터) 탄핵 반대 집회에서 받았던 '오마이뉴스'의 호외. ©김지환

당시 집회 현장에서 사용했던 표어. 모아 두었던 것 중 몇 장만 남겨 두고 대부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으로 보냈다. ©김지환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우리가 노무현을 기억하는 방식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은 육체적으로 죽었을지 몰라도 그 정신이 공기처럼 느껴지게 하는 노무현 대통령 최고의 어록이다. 세월이 흘러서야 노무현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장면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YTN> ‘돌발영상’ 중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건 때 현장을 찾아가 복지부동하는 담당자를 점잖게 꾸짖고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장면을 보면, 대통령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절감하게 한다. 보수 반동 세력은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을 갈아넣었던 노무현 대통령을 우습게 알고 조롱했다.

여기엔 엘리트 의식에 쩔은 진보 매체도 가담했다고 판단한다. 국민 앞에서는 깊게 허리를 굽히고, 외국 정상 앞에서 꼿꼿한 그의 모습을 보라. 기득권 세력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싶었겠지만, 시민은 노무현이야말로 고품격의 인격체였음을 모를 리 없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적극 대처하고, 온 국민이 참여해 기름으로 오염된 태안은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이미지 출처 = YTN이 유튜브에 올린 영상 갈무리)

나는 가끔 노무현의 쓸쓸한 선택을 떠올려 본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 임무를 수행했던 그에게 남아 있던 것은 무엇인가? 민주당 계열의 정치가들은 끝까지 노무현을 무시했다. 학생운동권 패거리주의로 자기들끼리 ‘호형호제’할 때, 노무현은 살짝 따돌림 당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홍구 선생의 어떤 책에서 살아생전 노무현 대통령에게 ‘형님’이라고 불러 볼 것을 하는 대목은 노무현을 둘러싼 주변 정치인의 분위기를 살짝 엿보게 해 준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은 보통 국민이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명확하게 짚어 내곤 한다. 최고의 연설문인 독도 관련 연설은 자신이 직접 집필했다고 한다. 전시작전통제권에 관한 이 연설은 당시 많은 화제를 불러왔다. (이미지 출처 = ‘빨간아재’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 갈무리)

노무현은 떠났지만 여러 문화 콘텐츠를 통해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다시 들여다보곤 한다. 2013년 상영한 '변호인'은 극장에서 두 번 보았는데, 일찌감치 판사 때려치우고 변호사로 개업해 부동산 등기에서 세금 자문까지 잘 나갔건만, 우연찮게 시국 사건 학생을 변호하게 된다.

세계적 명저 애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저자가 소련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온도서가 되고 만다. 학생들이 보았던 책을 꼼꼼히 읽어 가면서 그것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힌다. 그렇게 싸워 가면서 각성한다. 누가 봐도 노무현인 영화 속 송우석은 그렇게 전혀 다른 인생, 인권 변호사의 삶을 살아간다.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는 보는 내내 울컥할 뻔한 적이 몇 번 있다. 노무현 변호사의 운전기사가 결혼하는 날, 직접 차를 몰고 와 신랑 신부를 뒤에 태우고 앞 좌석에 권양숙 여사와 함께 경주까지 운전했다는 이야기,

한번은 금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 정치 앞에 괴로워하며 통곡했다는 장면, 또 어떤 콤플렉스 때문에 힘겨워 했던 대목 등 인간 노무현의 미처 몰랐던 많은 이야기가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겨 있다. 노무현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그와 관련된 콘텐츠 또한 계속해서 양산될 것이다.

노무현이 세상을 떠날 무렵 '비평'이라는 계간지 만드는 일을 했다. 잡지를 한참 마무리하면서 ‘생각의나무 이야기’를 썼는데, 23호 마지막 호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적었다. ©김지환

처음 몇 년간은 5월 23일을 맞이하면 애통함을 토로하곤 했지만, 이젠 노무현을 제대로 기억하고 또 이 땅의 민주주의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진화하고 있어 다행이다. 한국 사회에서 1970년대생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꽤 많은데,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정치 성향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측한다.

거기에는 전교조 세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무현의 영향도 그 원인 중 하나리라. 5공화국을 청산하고자 조직된 청문회에 반짝 등장한 그 촌스럽던 한 사람에게 눈이 갔던 청소년기에서, 소신을 지키며 기회주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그 사람을 뜨겁게 지지했던 청년기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쭉 함께했으니까. 그의 마지막은 억장이 무너지는 비통함을 불러왔으나, 우리 시대에 노무현이 있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비탄의 5월 23일이 조금 더 밝아지고 있음은 분명 세월의 힘이자 우리 민주주의 힘이기도 하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