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詩, 곰삭한 맛

<시인 유안진의 시모음>​

<시인 유안진의 시모음>

사리(舍利)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의

사리(舍利)처럼 남을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가을 편지>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겨울을 기다리며>

 

겨울이 오면

나는

바람이 될 거야

더는 못 참는 침묵에서

더는 못 감출 이름을

마음껏 소리쳐 불러보는 목소리가

밤낮 주야 가리지 않고

천지사방 거침없이

목놓아 외쳐대는 북풍의 목청이

부르고 싶은 이름 하나에

미쳐버린 겨울바람

그 목소리 될 거야, 되고 말 거야.

<꽃 지는 날에>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꿈>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낙엽 쌓인 길에서>

 

한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또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눈물>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뼈가 녹아 물이 되고

살이 녹아 물이 되고

살아가는 길

긴 여과의 과정에서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울부짖는

날이 날마다

사랑도

시도

그리고 학문도

배신을 일삼는

수치와 약점일 뿐

녹아도 녹아도

녹지 않는 뼈와 살

오직 그 하나

나의 참뜻은

마지막 그날에

생애를 걸러서

우러나는 한 방울

신이 정녕 계실진대

무심한 하느님

그로 하여 나는

<눈사람>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이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하나 지어 눈맞춤 하리라

<들국화>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랏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띄우고

마중나오신 성녀

<멀리 있기>

 

멀리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리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서리꽃>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실패할 수 있는 용기>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아침 기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 수 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神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어 있어

늘 미안한 자격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약속의 별>

 

몹시 외롭고 쓸쓸해지는 때는

걸어온 옛길로나 돌아가게 되나봅니다

못내 초라하고 서글퍼지는 때에도

보물찾기하듯

그 길섶을 뒤적이게 되나봅니다

긴긴 겨울밤 얼어붙은 깜깜 하늘에는

왠지 낯익은 듯

눈물 머금은 별 하나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다가

까맣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약속 하나, 언약 하나, 맹세 하나를

내 어려서 철없던 꼬맹이적에

심심해서 별이나 헤아리며

혼자 놀던 어느 밤에

문득 아름다운 별 하나에 넋이 빠져

단박에 나의 별로 점찍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별

이담에 나도 너처럼 빛날 거야」

턱을 괸 두 손 풀고 발딱 일어서며

나 혼자 중얼거려 약속했습니다

그 별도 기뻐서

더 크게 더 밝게 빛났습니다

그 이름은 놀림말로

개밥바라기라고 하지만

초저녁엔 금성이고 장경성(長慶星)이고

태백성(太百星)이며

새벽녘엔 샛별이고 명성(名星)이고

계명성(啓明星)이라 부르는 줄은

한참 뒤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애들한테 따돌림받고

슬퍼지는 외토릴 때

손등으로 눈물 닦다가도

고개 들면 웃어주는 별

「힘을 내!

하마 잊었니 우리의 약속을?」

그때 이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밤중에 잠이 깨어도 문 열고 내다보며

눈맞춤도 눈흘김도 눈쌈도 하였고

신새벽 뒷간 가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짓궂게 놀려대어도 나는 행복했습니다

꿈이 너무 많고

너무도 화려하여

눈물도 웃음도 변덕스럽던 여학생때는

단짝 친구랑 나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영원한 우정을

기막힌 야망을

여름밤 하늘의 별 하나를 정해놓고

손가락을 걸어서 우린 언약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아득한 훗날 그 어디에서라도

우리의 우정은 언약의 별같이

밝고도 찬란할 것이라고

언약의 별 같은 인물이 되자고

새끼손가락을 세 번 잡아당겼습니다

애인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여

숫되고 서툴던 내 처녀적에

별 하나에 사랑을 맹세해 주던 이여

별 하나에 포부를 다짐해 뵈던 이여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몰라도

지금의 하늘에는

맹세의 그 별이

그날처럼 밝고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는 일이 피곤할 때

더러더러 생각날까요

뜨거운 그 호소 그 맹세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까요

덧없고 부질없어라

우정과 사랑이면 더욱 그러하여라

세월이 지나간 휑하니 빈 자리에는

그 약속, 그 언약, 그 맹세 모두

어처구니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달픈 퇴근길에 헛발을 디디다가

잠 안 오는 밤중에 안경알을 닦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약속의 별 하나

아이적 내 별이여, 우정의 우리 별이여

영원을 맹세하던 첫사랑의 별이여

어느 한 가지의 약속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온 오늘은

그저 할말이 없습니다

오직 미안할 뿐입니다

아이처럼 다리 뻗쳐 마구 울고 싶습니다.

<작정>

 

모르며 살기로 했다.

시린 눈빛 하나로

흘러만 가는 가을 강처럼

사랑은 무엇이며

삶은

왜 사는 건지

물어서 얻은 해답이

무슨 쓸모 있었던가

모를 줄도 알며 사는

어리석음이여

기막힌 평안함이여

가을하늘빛 같은

시린 눈빛 하나로

무작정 무작정 살기로 했다.

<조각달>

 

사랑이 떠난 후에

알게 모르게 허물어진 몸

허공에 떠도는 줄

혹시 알리 또 모르리만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겨

홀로 기웃대었다

그대 뉘 지아비 되고

나 또한 지어미 되니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맹물 같은 웃음뿐

가벼이 반공중에서

사라지고 말아라

무궁한 세월이 흘러

저승길 더듬을 제

그 누가 문책하면

품안에서 꺼내 뵈리

네 가슴 노리던 비수

 

<키>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봄비 한 주머니>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황홀한 거짓말>

 

<사랑합니다>

너무도 때묻힌 이 한마디 밖에는

다른 말이 없는 가난에 웁니다.

처음보다 더 처음인 순정과 진실을

이 거짓말에 담을 수 밖에 없다니요.

겨울 한밤 귀뚜라미 거미줄 울음으로

여름밤 소쩍새 숨넘어가는 울음으로

<사랑합니다>

샘물은 퍼낼수록 새물이 되듯이

처음보다 더 앞선 서툴고 낯선 말

<사랑합니다>

목젖에 걸린 이 참말을

황홀한 거짓말로 불러내어 주세요.

- 시인 유안진

 
 

'詩, 곰삭한 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빠, 사랑해요!>  (0) 2024.08.09
마루를 닦다가  (0) 2024.08.04
회개(悔改)  (0) 2024.06.16
<한줌의 흙이 되어>  (1) 2024.06.13
나무들은  (0) 2024.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