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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人의 삶

<돈과 복음>

<돈과 복음>

‘진짜’ 돈이 무엇인지 말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돈과 하느님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라 여겨지는 세상에서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어떻게 복음적 삶을 구현할까 하는 물음도 ‘실천적으로는’ 구분하기가 모호해진다. 이런 세상에서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요,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솔직해지자. 이유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하느님이나 복음보다는 돈에 더 유혹을 느끼고 돈을 향하지 않는가. 없는 듯 계시는 하느님이나 불편한 예수의 복음보다는 돈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보상을 보여 주지 않는가.

하느님과 복음은 멀리 있고(어쩌면 없을 수도 있겠다) 돈은 가까이 있다. 돈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보다 더 풍성한 삶을 약속하는 것만 같다.

돈을 더 벌면 더 복음적으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보다 더 벌면 이런저런 단체에 후원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 크게 한턱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돈은 정말 배신하지 않을 것만 같다.

나이도 들어가니 노후도 대비해야 해서 주식이나 저축은 기본이고, 투기인지 투자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뭔가 그럴듯한 재테크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 늙어서 침대에만 있지 않으려면 건강도 챙겨야 한다. 건강을 챙기려면 돈이 필요하다. 고독사하지 않도록 친구들과 만나야 하고 친구들과 사귀려면 또 돈 들 일이 많다.

그래도 나는 신앙인이니까 이것만으로는 허전하니 정신적 품위를 위해 ‘영성’도 보듬어야 한다. 영성은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다. 있어 보이는 무엇은 감 잡기 쉽지 않아서 있어 보인다. 뻔한 것은 그대로 노출되기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가시적으로 이미 있는 것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드문드문 나오는 연예인들의 작전을 ‘신비주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신비주의라고 하면 호기심을 자극하고 무언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영성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아무튼 돈으로 채울 수 없는 무엇인가를 채워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돈이 충분하다면 굳이 영성을 어렵게 구할 필요가 없을 것도 같다. 돈만 충분하다면 하느님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돈은 이미 복음이요 하느님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에 점령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하느님보다 돈이 더 필요한 세상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우리가 돈을 대하는 태도와 돈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어떤 하느님을 믿는지도 알려 준다.

실천적으로 볼 때 예수의 복음은 사실상 폐기 처분된 신앙인의 장식품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복음은 삶을 요구하고 돈은 삶을 유혹한다. 오늘날 사회의 복음은, 돈을 더 벌고 비축하여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고 건강한 몸을 만들며 건전한 취미 생활을 가꾸고 인간관계를 넓고 깊게 가져가야 한다는 조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불안한 사회경제적 구조와 실존적 불안에서 유래한 것이겠지만 신앙인이라고 해서 복음을 특별하게 달리 이해하거나 제시하는 것 같지도 않다. 신앙인이건 비신앙이건 우리는 어느 정도 돈에 저당 잡힌 삶을 산다. 돈과 건강과 고독하지 않은 인간관계, 이 세 가지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긍정할 수 있는 ‘복음’의 요체가 아닐까 싶다.

돈의 우상화요, 육의 우상화며, 관계의 우상화다. 마몬의 승리다. 신앙인들 역시 하느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느라 너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의 복음이라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하거나 상반된 삶을 사는 실천적 이단일지 모른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 것을 그들에게 명하셨으니, 곧 빵도 자루도 전대의 돈도 가져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속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하셨다.”(마르 6,8-9)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서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을 일러주신 말씀이라 하겠다. 아마도 당시 제자들은 저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 시대와 우리 시대를 등가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저 말씀에 담긴 어떤 태도, 어떤 지향, 종말론적 전망 등은 신앙인이라면 오늘 우리도 곱씹을 만하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길에서 살아가지만, 필연적으로 세상이라는 길을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의 영성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리스도교 경전에 포함됐어도 충분히 수긍이 될 만한 초대 교회 문헌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디다케 11) 간명한 말씀이다. 돈을 요구하는 사도는 사이비라는 뜻이다.

젊은 시절 이러한 말씀과 메시지를 믿고 따라서 내일 걱정하지 않고 지내다 오늘이 왔다. 나이가 들었다. 그런데 간간이 느닷없이 닥치는 이 불안감은 무엇인가. 만일에 혹시 돈이 충분했다면 예수의 복음을 더 추종하는 삶을 살았을까?

더 궁핍하게 살았다면 내 삶은 더 복음적이었을까? 돈과 복음의 경계에서 감지하게 되는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내 삶의 숨결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늦은 밤에 다시 신앙과 복음을 묻는다.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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