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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2024년 나해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2024년 나해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5,1-10

<오늘 복음은 회개한 양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와 은전 하나를 찾아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는 어떤 부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의 회개는 하느님을 정말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1967년 8월에도 온 국민이 한 사람의 생명이 살아난 것 때문에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새마을 운동을 강조하던 시절 충남 청양 구봉 광산에서 김창선 광부가 수직갱도의 붕괴로 120미터 아래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는 전화가 있어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됩니다.

언제까지 버틸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 열악한 장비로 수많은 사람이 투입되어야 하고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하는데 구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전 국민에게 그 가족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남편이자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제쳐놓고 구출작업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2,200여 명이 구조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김창선 씨는 떨어지는 물방울을 옷에 묻혀 그 옷을 씹으며 15일을 버텼습니다. 그가 절망에 빠질 때 가족들은 온 국민이 기도하고 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16일째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이는 갱도 밑에서 세계에서 가장 최장 시간을 버틴 기록이 되었습니다. 구출 당시 김 씨는 건강도 정신도 또렷한 상태였습니다.

이 일로 대통령은 물론 온 국민이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서? 그럴까요? 그래서 기쁠까요? 애초에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사실 4일째 되는 날 김창선 씨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를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쁜 걸까요? 내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2,200명과 엄청난 돈을 투입해 살려낼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도 저런 처지가 되면 나를 똑같이 구해줄 나라에 산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느님 나라가 되는 방법은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목자들이 많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영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을 모실 성전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게 아닙니다.

의인 아흔아홉은 적어도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게 행복한지 아는 회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주인에게 사명을 받은 목자만이 주인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파견받는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냥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머무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회개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되게 합니다.

내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양이 되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창선 씨도 1982년 매몰 14일 만에 생존한 태백 탄광 사고 생존자들을 찾아가서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김창선 씨의 사례를 보고 버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김창선 씨는 말합니다.

“죽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내 목숨 하나가 그토록 소중한 거라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이야기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복자품에 오른 바로톨로 롱고(Bartolo Longo)의 이야기입니다. 바르톨로는 나폴리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졌습니다. 반 가톨릭 교수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회의주의와 경멸을 흡수했습니다. 그의 호기심으로 인해 그는 강령술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사탄 숭배에 가담하게 되었고 심지어 강신술의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그에게 명확성이나 진실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괴로운 환상과 악몽과 함께 끊임없는 공포, 어둠, 깊은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신비술 수행을 계속했고 점점 더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폼페이에서 일어났는데, 그곳에서 바르톨로는 절망과 자살 충동에 압도되어 사탄과의 계약의 결과를 반성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가 하느님께 봉헌된 것처럼 사탄의 신부로서 마귀에게 속박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영원히 저주 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과 씨름했습니다.

바르톨로가 갑자기 묵주기도에 관해 들었던 약속, 즉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라는 약속이 기억난 것은 바로 이 강렬한 암흑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억은 그에게 희망의 불꽃을 가져다주었다.

감동에 사로잡힌 바르톨로는 땅에 엎드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약속이 참이라면 묵주기도 신심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오랫동안 느꼈던 고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깊은 평화의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삼종기도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여 이 은총의 순간을 더욱 확증해 주었고 바르톨로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즉시 도미니코수도회 신부인 알베르토 라덴테(Alberto Radente) 신부를 찾았고, 그 신부는 그에게 영적인 지도를 제공했고 결국 그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정기적인 모임과 기도, 참회를 통해 바르톨로는 묵주기도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신비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돕는 사명을 발견하면서 교회와 화해했습니다.

바르톨로의 개종은 너무나 심오하여 남은 생애를 묵주기도에 바쳤고, 궁극적으로는 폼페이에 유명한 묵주기도의 성모 성당을 짓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삶은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 은총의 구원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존 뉴턴 사제는 처음엔 노예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고는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가 되어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자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 죽어가는 이들을 두고 풀만 뜯는 양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양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젠 길 잃은 양을 살리는 목자가 되게 합니다.

-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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