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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 쉬니 感謝

<흙 한줌>

            입 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 (어른을 위한 동화)

                                        <흙 한줌>

유미는 할머니 집이 보이는 살구나무 밑에서부터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이!” 마침 텃밭에서 상추를 솎고 계시던 할머니가 두 팔을 벌리며 나왔다. “서울 우리 유미가 왔구나. 어디 한번 안아보자.”

그러나 유미는 밭에서 나온 할머니를 보자 뒷걸음질을 했다. “왜 그러냐? 이

할미가 싫으냐?” “아냐요,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좋아요.”

“그런데 왜 피하느냐?”

“새 옷을 입었으니까요. 할머니한테서 더러운 흙이 옮을까 봐 그래, 할머니.”

“원 녀석도...”

이 날 밤에 할머니는 유미를 팔베개해 눕히고서 물었다.

“유미야. 왜 흙이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느냐?”

“옷에 묻혀 가면 엄마한테 더럽다고 야단맞고, 발에 묻혀 가면 아빠한테 더

럽다고 야단 맞고.”

할머니는 끌끌 혀를 찼다.

“할머니, 서울에는 흙이 적어. 그러니까 깨끗해. 길도 반질반질하고 집도 반

질반질하고, 하늘나라도 서울 같을거야, 그지 할머니?”

“원 녀석도...”

할머니는 까칠한 손으로 유미의 뺨을 만졌다. “유미야.” “네, 할머니.”

“이 할머니의 손이 까칠해서 싫지?”

유미는 고개를 저었다.

“왜, 일하지 않는 반질반질한 서울 사람들의 손이 더 좋을텐데.”

“아니야, 할머니. 할머니한테서는 구수한 티밥 내음이나. 나는 할머니의 이

내음이 엄마의 화장품 내음보다 더 좋은걸.” “이 할머니한테서 나는 것은 흙내음뿐인데, 유미야.”

“할머니, 정말이세요?”

“정말이고말고, 흙은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소중한 것이란다. 흙에서 곡식도 나

고, 채소도 나고, 과일나무도 나고, 풀나무도 나고, 꽃나무도 나고, 흙이 없으면 우리는 살지 못해요...”

할머니가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유미는 어느새 새록새록 잠이 들어 있었다.

이튿날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유미한테 할머니가 작은 옹기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할머니, 여기에 담긴 거 흙 아냐?”

“그래, 흙이다. 그 속에 내가 비밀을 하나 살짝 묻어놓았지. 그러니 집에 가

서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고 사흘마다 한 번씩 물을 주거라. 그러면 비밀이 풀

릴 것이다.”

“정말이지, 할머니?” “그럼, 정말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유미는 할머니가 시킨 대로 흙 담긴 옹기를 창가에 두었다. 그

러고는 사흘마다 한 번씩 빠뜨리지 않고 물을 주었다.

얼마 가지 않아 흙 속에서는 푸른 싹이 돋아났다.

푸른 싹은 무럭무럭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그러더니 오늘 아침, 마침내 노오란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엄마, 할머니가 주신 비밀이 이제야 풀렸다."

"오오, 그렇구나. 금잔화다."

"엄마, 흙은 참 신기하다."

"왜?"

"흙 한줌이 저렇게 예쁜 꽃을 피우잖아."

"그래그래 옳은 말이다. 꽃만이 아니란다. 곡식도 과일도 채소도 다 흙에서 나오지."

"그런데 엄마는 왜 흙을 미워해? 내가 흙을 묻혀 왔을땐 때리고선 뭐."

"아니지. 네가 옷이나 신발에 흙으로 분탕질을 해오니까 네 부잡스러운 것을 야단친 것이지 흙을 미워한 것은 아니란다."

이때 유미가 엄마의 귀를 끌어당기고서 가만가만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엄마. 깜빡 잊어버릴 뻔했다. 시골 할머니 집에 가서 자던 밤에 말이야.

내가 하늘동네에 올라간 꿈을 꾸었어. 그런데 엄마, 우리 할머니께서 치마폭에 흙을 담아 가지고 거기에 오셨지 뭐야."

- 정채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