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의 길(平和)

< 단테의 ‘지옥문’>

                          < 단테의 ‘지옥문’>

위대한 천재 시인 단테는 신곡의 지옥 편에서 ‘지옥의 문’을 묘사하면서 “나를 지나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중략) 여기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라고 세 번이나 ‘나를 지나(per me)’를 강조하고 있다. ‘나’는 지옥문 위에 씌어 있는 비명의 문자로 ‘지옥문’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주석가들은 여기 ‘나’는 결국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내가 분별없는 행동을 해서 남에게 절망을 안겨 준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지나(per me)’ 타인이 절망의 장소로 행하는 것이므로 내가 곧 ‘지옥의 문’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개인은 물론 한 단체나 사회도 자칫 잘못하면 인간은 그 누군가에게 스스로 지옥문이 되어 타인을 지옥 같은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한 ‘용산철거민들의 참사사건’과 ‘화왕산 억새 태우기 참사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생지옥 같은 체험’을 안겨주었다. 특히 용산참사는 더욱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법대로’라고 하지만 사회 약자들의 하소연을 무시한 채 ‘출구 없는 세계’로 몰아붙인 법은 설령 ‘정의’를 바탕으로 하였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정의는 ‘사랑’이라는 더욱 깊은 힘에 열려 있지 않으면 얼마든지 스스로 배반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정의의 척도로만 다스려 질 수 없다. 사랑을 통해서 ‘교정’되지 않은 정의가 위험한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공권력은 한 국가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앞서야 할 가치와 덕목은 사회 약자들을 위한 ‘사회적 정치적 애덕과 관용’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 계층과 계층 사이를 원활한 연대성과 보조성의 원리로 묶어주는 끈이 되고, 관계를 원활케 하는 윤활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애덕이 사회 정치 공동체 안으로 확산되는 문화를 이루어 가는 사회만이 소위 장래가 있는 문화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 약자들의 ‘상실감과 소외감’을 최소화할 수 있을 때만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평화가 정의의 열매’라면 오늘과 같이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는 ‘평화는 연대의 열매’가 된다(요한 바오로2세)는 것을 새롭게 되새겨 ‘연대성’을 통감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지옥문 앞에서가 아니라도 내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일’과 이웃 스스로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여유와 안목을 지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교육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후손들에게 ‘기쁨과 보람’ ‘희망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수 있는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2009.2기고)

- <조광호 신부·인천가톨릭대 종교미술학부 교수>

'마음의 길(平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음의 길 >  (0) 2023.01.10
< 마음의 라식 수술 >  (0) 2023.01.04
< 당신을 만나고싶습니다 >  (0) 2022.12.28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글>  (0) 2022.12.27
<자존심>​  (0) 2022.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