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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창세8.6-13.20-22.마르8.22-26)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어떤 물건을 인터넷에서 구매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물론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 가격 비교 사이트를 보고서 단 10원이라도 더 싼 쇼핑몰을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물건에 대한 비교를 많이 해서일까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교도 참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를 새로 장만하려고 하는데, 자동차와 자전거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아니, 그렇게 멍청한 비교가 어디 있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동차와 자전거는 둘 다 이동 수단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지요. 쌍둥이라도 성격이 다르고 특기와 재주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유한 ‘나’를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본당 신자가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임 신부님보다 여러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강론, 업무 처리, 신자들과의 친교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비교가 맞을까요?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느 할머니께서 역대 본당 신부님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무엇을 잘하셨고, 저 신부님은 저것을 잘하셨고….”라는 식으로 각 신부님의 고유한 면을 바라보면서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의 습관적인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분히 하나씩 고쳐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고유한 면을 발견하면서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간다면, 어느 순간 어떤 사람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냥 단번에 고쳐주시면 될 것 같은데, 여러 단계를 거치십니다.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곧바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또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당 한 번 나갔다고 미사 한 번 참석했다고 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주님의 품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

행복의 비결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다(제임스 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