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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福音 묵상

< 단식,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 >

2023년 2월 2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58.1-9ㄴ.마태9.14-15)

< 단식,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 >

언젠가 깊은 속병이 들어, 본의 아니게 한 일주일 강제로 단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이틀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는데, 사흘이 지나가니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더군요.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식사 시간보다는 야식(夜食) 시간이었습니다.

밤 9시 반만 되면, 이 병실 저 병실 분산되어 있던, 약간은 ‘날리리성’ 분위기가 풍기는 환자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듯, 의료진 몰래 둘러앉은 그들은 미리 준비해온 통닭이며 족발을 꺼내놓고 낄낄대며 뜯어대곤 했는데, 그 냄새 하며, 소리하며,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제가 느꼈던 철저한 소외감과 고독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발적 단식이라는 것,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본인 스스로 억제시킨다는 것, 보통 의지로 해내기 힘든 일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 위대한 인물들은 대체로 단식을 했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도 장장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라든지 대 예언자 엘리야도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단식과 관련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밥먹는 것 이상으로 단식을 자주 실시했습니다.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역시 일주일에 두번 꼬박꼬박 단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과 성덕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 가까이 서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함을 뜻합니다.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에 민감해집니다. 단식을 통해 한 인간은 악과 유혹을 억누르고 영혼을 드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축일 전에 신자들을 단식에로 초대했습니다. 영성가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단식이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예수님께서는 부차적인 측면, 비본질적인 내용들은 생략하시고, 곧바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서론을 생략하시고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을 맺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음주나 가무, 노래와 축제이지, 단식이나 고행, 슬픔이나 곡소리는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랑이신데, 그 신랑이 지금 신부를 선정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이름은 ‘부름받고 선정된 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끌레시아(Eclesia, 교회)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상 교회를 신부로 맞이하시고, 이제 신부와 함께 혼인 잔치를 시작하시는데, 제자들과 신자들은 이 장엄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즐겁고 유쾌해야 합니다. 갖은 인상을 다 쓰면서 단식할 것이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혼인 잔치가 끝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신부의 집을 마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선정된 교회는 아직 결정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는 강생과 종말 사이, 첫 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기쁨과 슬픔, 획득과 미획득, 축제와 단식이 거듭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