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티소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리는 자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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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일
(지혜 11,22-12,2. 2테살 1,11-2,2 . 루카 19,1-10)
< 하느님의 시선 >
회개하는 죄인에게 자비 베풀고
모든 피조물 감싸는 주님의 사랑
삶의 고통 이해하고 승화시키며
주님 닮아가기 위한 기도 바치길
■ 세상은 둘로 나눠지지 않아요
“단정하는 사람을 믿지 말아요/ 세상은 둘로 나눠지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당신을 미워하는 게 아닌 것처럼….”
‘브로콜리 너마저’라는 밴드가 부르는 노래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를 듣습니다. 가수는 담백한 목소리로 일상의 진실을 노래합니다. 그렇지요. 세상만사가 흑백으로 나눠지지 않듯이 사람은 천사나 악마가 아니라 그 가운데 어디쯤을 오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잊고 누군가를 악마처럼 깎아내리거나 천사처럼 떠받든다면, 언젠가는 실망과 배신감, 분노와 환멸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게 실망하고 세상에 배신감을 느낄 때, 내가 하느님이 된 것처럼 단죄와 복수의 칼을 휘두르고 싶을 때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어떻게 보실까?”하는 물음 말씀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십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지혜서 안에서 ‘하느님의 교육법’이라 일컫는 부분(11,2-19,22)에 속합니다. 학자들은 지혜서가 기원전 50년경 유다인 디아스포라에서 집필되었다고 봅니다. 디아스포라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거주하는 공동체를 말하는데, 당시 객지 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어쩌다 고향을 잃고 떠다니는 신세가 되었느냐고 한탄합니다. 고생이 심하다 보면 서운한 마음이 정신을 흐리기 십상이지요. 현실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힘들 때, 인간은 누군가에게 탓을 돌리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서는 주님께 비하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작은 존재인지를 먼저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만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우주의 자연 현상들이 보여주는 힘 앞에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러나 광대한 세상도 하느님께는 땅에 내리는 아침 이슬 한 방울에 불과할 뿐(지혜 11,22)이지요.
이런 하느님의 권능보다 더 놀라운 것은 모든 피조물을 감싸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악한 사람이 정의의 철퇴를 맞으면 세상이 더 좋아질 텐데 하느님은 왜 침묵하시는지 의문스럽다면, 23절이 그 답을 줍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 이로써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11,26) 왜 악인이 승승장구하고 의인이 고통받는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계신다면 왜 세상이 이토록 고난으로 얼룩져 있는가 같은 물음 앞에 지혜서가 답을 주는 셈입니다.
■ 고통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은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좋은 의미를 부여한다 해도 고통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승화시킬 줄 아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분명히 다릅니다. 내 삶의 고통 앞에서 원망하고 비난할 누군가를 찾는 사람과, 고난과 아픔마저도 우리를 양육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가릴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화답송)라고 찬미하는 사람은 매사가 순조롭고 고통이 없어서 꽃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유배와 떠돌이 생활이라는 고난을 거친 구약의 백성들은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고난을 두고 우리가 내리는 경솔한 판단 보다 하느님의 선의와 자비를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 자캐오를 알아보신 예수 그리스도
같은 맥락에서 복음은 자캐오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이 엇갈리는 상황을 기록합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예수님을 보려고 애써도 군중에 가려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기관장 신분에다 돈푼깨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나서서 길을 열어줄 텐데, 복음의 자캐오는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캐오를 멸시하고 우습게 봤는지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자캐오와 예리코 사람들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 아니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등에 업고 세금을 받아가는 자캐오가 보기 싫었을 것이고, 자캐오는 돈 걷는 게 일인지라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수금할 지갑처럼 보였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캐오를 찾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자캐오를 쳐다보시고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잃은 이’(루카 10,9-10)임을 알아보셨습니다.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에게서 회개하는 죄인의 모습을 알아봐 주셨기에 자캐오는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새 삶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생명을 자비롭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이 죄인 하나를 회개시킬 뿐 아니라, ‘가난한 이에게 베풀고 횡령한 것을 갚는’ 선행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삶의 고통 때문에 누군가가 몹시 원망스럽고 밉다면, 예리고 사람들처럼 그를 외면하고 말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길을 닮으려고 애쓸 때, 거기에 회개가 일어나고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며 고통의 짐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미움과 원망이 우리 눈을 가릴 때 우리가 바칠 기도는 이러합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의 눈을 닮게 하소서.”
-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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