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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堂-감사 찬미 제사

사순 제4주일 - 구원의 조건

사순 제4주일 - 구원의 조건

(1사무 16,1ㄱㄹㅁㅂ.6-7.10-13ㄴ.에페 5,8-14. 요한 9,1-41)

세속적인 잣대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스스로 만든 ‘조건’에 갇힌 사람들

차별과 편견 없이 이웃 사랑하고

구원의 손 내미시는 주님 따라가길

세바스티아노 리치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는 그리스도’.

행복과 사랑과 구원, 가깝고도 먼 이름들

너무 추상적이고 뜻하는 바가 다양해서 사람마다 달리 해석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행복, 사랑 같은 개념 말씀입니다. 누구나 어렴풋하게 알고 있고 조금씩 경험한 바도 있지만, 막상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가까이 떠다니지만 손에 잡으려면 터지는 비누거품 같다고 할까요.

‘구원’도 신앙인들에게 익숙하면서 구체적으로 풀어내기 힘든 개념에 속합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성자를 보내주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면, 말뜻을 알아듣고 행복해하실 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것이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반응이겠지요.

행복과 구원의 조건

그래서 많은 이들은 행복과 사랑과 구원 그 자체를 추구하는 대신, 자기 생각에 이러면 행복과 사랑, 구원을 얻을 수 있겠다는 조건을 채우려고 애씁니다. 남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 구원의 조건을 따라가기도 합니다. 대체로 건강과 재력, 인맥과 학벌, 또 재능과 외모 같은 것들을 손꼽지요. 그리고 그 조건에 못 미치면 불행해 하고, 구원의 가능성도 낮춰 봅니다.

자기만 그리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문제는 남에게도 그 잣대를 들이대는 데 있습니다. 당사자는 괜찮다는데, 남들이 나서서 “그런 식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돈은 없어도 행복한 삶을 살겠다면 “당신이 세상을 몰라서 그러는데…”라며 비웃습니다. 자기만큼 행복의 조건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보다 행복해 보이면, 시기와 질투가 끓어오릅니다. 구원하시는 하느님, 구원을 받는 당사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조건을 달고 가능성을 막아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눈먼 사람, 그리고 주위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랬습니다.

조건을 다는 사람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일행이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는 데서 출발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저 사람은 신체의 장애를 지녔으니 불행할 테고, 또 그의 불행은 죄를 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탓이라는 편견이 비칩니다. 제자들은 눈먼 사람을 위해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를 건강과 거룩한 삶이라는 행복과 구원의 조건을 못 채운 사람으로 낮춰 보며 값싼 동정을 보내는 데 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요한 9,4)며 제자들의 편견을 일축하시고 눈먼 사람에게 다가가십니다. 힘들고 팍팍한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말하자면 “잠자는 사람, 죽은 이들”(제2독서; 에페 5,14) 같던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은 직접 진흙을 개어 발라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힘을 내서 스스로 실로암 못을 찾아 씻게 하십니다. 전형적인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다가가셔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구원을 받는 이가 신앙의 응답으로 일어서게 만드는 과정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러자 이 구원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바리사이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가 생생하게 증언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에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실 수 없고, 소경은 자기들 기준에 행복과 구원의 조건도 채우지 못했으니까요. 유다인들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불경한 짓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요한 9,24)라고 단정합니다.

인간의 조건, 하느님의 뜻

제1독서도 인간이 생각하는 조건과 하느님의 뜻이 갈리는 모습을 전합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이끌 임금을 뽑는 자리에서 엘리압에게 마음이 기웁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고 하시며 소년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인간이 설정한 조건은 인간의 조건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내건 조건은 타인의 가능성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종종 차별의 빌미로 작용합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일 수 있는가”라며 타인의 행복과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을 동등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구원을 만나다

반면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눈먼 사람은 눈을 감고 살았던 덕에 오히려 편견 없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다른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요한 9,25) 그렇게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 빛의 세계를 걸어가게 됩니다.

어느덧 사순 제4주일, ‘즐거워하라’ 주일입니다. 엄격한 절제와 극기로 지칠 법한 시점에 부활의 기쁨을 생각하며 힘을 내는 주일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또 이웃에게 편견을 품지 않았는지 성찰해 봅시다. 하느님은 그 편견과 전제들을 무너뜨리시면서 먼저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알아 뵙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