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牧者의 지팡이

‘더 미룰 수 없는 교회개혁’ 10년

‘더 미룰 수 없는 교회개혁’ 10년

프란치스코 교황직 10년

제목을 이렇게 달고 나니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초장에 길을 잃을 것만 같다. 망설이다 건져 올린 마음 하나, ‘감사’!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건강하게 생존해 계서서 감사하고 자기 고집에 빠진 노인네로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경청하고자 하는 원숙하고 연륜이 깊은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 주어서 감사하다.

더욱이 2013년 교황직을 시작하고 얼마 뒤에 발표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이래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교회개혁과 쇄신을 말하고 이를 실천해 온 삶이, 교회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고맙고 또 고맙다. 개인적으로는 교황의 교회개혁 의지에 감화되어 이 난의 제목을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하고, 2016년부터 지금까지 평신도의 눈으로 교회개혁을 말할 수 있는 계기와 영감을 주어서 진정 감사하다.

비판이 거의 자취를 감춰 버린 한국 교회에 이런 말과 생각에 그늘을 드리워 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 주어 정말 감사하다. 즉위 10년이 되는 마당에도 이 ‘칼럼을 접겠다’는 낙담이 아니라 ‘계속 써 보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해 주어서 더없이 감사하다.

돌아보면 지난 10년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그 길에서 수많은 반대와 비판에 부딪쳤음을 어렵잖게 목격한다. 교회를 세속과는 완전히 다른 강력한 요새로서의 ‘완벽 사회’(perfect society)로 여기고 ‘세상 정화’를 목표로 삼는 극우적, 근본주의적 성직자와 신도가 교회 구조의 개혁을 말하는 교황에 침묵하기는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복음을 더 분명하게 증언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우리를 복음화하도록 내어 맡겨야”('복음의 기쁨' 121항) 한다는 일성은 교회 기득권자들에게는 ‘부자와 바늘귀’처럼 좀체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도전이었음이 분명하다. 더욱이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라 함은 타 종교와 토착 종교, 백인만이 아닌 다른 민족들, 특히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말하는 것이고 이들을 통해 교회를,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복음화하게 하자는 주문이니, 소화는커녕 ‘이물질’이나 ‘이단’으로 치부하며 토해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2019년 아마존 주교 시노드가 한창인 당시 로마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예식을 위해 안치한 아마존 지역 토속 여신 ‘파차마마’(Pachamama) 상들을 오스트리아 출신 백인 청년 두 명이 훔쳐 내 인근 티베르 강에 던져 수장시켜 버린 사건은 이런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은 이를 녹화하여 유튜브에 올렸다.)1) 나중에 이 목각상은 건져 올려져 다시 안치되었고 이에 대해 교황이 사과했지만 전임 신앙교리성 장관 뮬러 추기경은 ‘우상숭배’이며 심각한 ‘대죄’라고 강하게 비판했고, 레이몬드 버크 추기경도 ‘성당 안에 우상숭배와 악마의 세력이 경배받은 데 대해 보속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

이쯤되면 시쳇말로 ‘막가자는 것’이다. 비판이 아니라 비난을 넘어 적대요, 직접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이단이니 몰아내자’는 주장과 진배없다. 어디 그뿐이랴. 이 시노드에서 아마존 지역의 사제 부족이라는 현실로 인해 사제 독신 및 기혼자 서품 문제에 예외를 두자는 제안이 나오고,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제 독신은 교리가 아니라 전통이므로 변경할 수 있다’며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자 전직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직 수행에 차질을 빚게 했다.3)

더욱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측근 실세로 여겨졌던 조지 펠 전 교황청 재무원장이 프란치스코의 교황직을 “대실패요 대재앙”이라고 저주를 퍼붓듯이 비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섹슈얼리티와 여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2년에 걸쳐 평신도의 의견을 듣고 있는 것은 “독약 같은 악몽”이라고 아주 대놓고 맹비난을 쏟아 냈다. 측근이었던 그가 교황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것은 펠 자신이 워낙 완고한 보수자인데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을 강조하고 이와 관련해 평신도의 의견을 경청하는 등의 태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4)

‘어떻게 가르침의 대상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지’, 불변의 진리 자체인 요새로서의 교회를 어찌 감히 허접한 ‘야전 병원’ 같은 곳에 비유를 하는지, 이런 어불성설은 그에게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는 2000년 동안 ‘하나의 교회’이며 그 구조가 변화 또는 개혁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펠 추기경의 분노는 이런 신념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프란치스코의 말과 행동에 기인하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고 여기는 많은 극우 가톨릭을 대변한다고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